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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Sep 11. 2018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3


부엌에서 나오면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장독대가 있다. 멀리서 보면 장독이 작아 보이는데 가까이 가보면 사람이 두 명쯤 들어갈 만큼 큰 독도 여러 개 있다. 햇볕 좋은 날은 흰 곰팡이가 앉은 메주가 엇비슥하게 동동 뜨고, 새까만 참숯이 메주에 다리를 척 걸치고 있는 전통 간장을 볼 수 있다.


 옆에 가면 짠 내가 진동하는데, 어찌 그게 없으면 음식이 맛이 없을까 서노는 참 궁금하기도 했다. 또 그 옆에는 아가리에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시원한 망사 옷이 입혀진 독도 있다. 거기에는 속살이 발갛고 겉은 거무죽죽한 고추장이 담겨있다.



겨울에는 그 큰 독을 두세 개 집으로 들여서 대청에 두고 고구마를 가득 채웠다. 겨우내 간식은 고구마였다. 쪄서 먹고 구워서 먹고 말려서 말랭이로도 먹는다. 말랭이를 할 때는 삶은 고구마를 잘라서 채반에 올려 볕 좋은 곳에 두고 말린다. 젤리처럼 쫄깃한 맛이 일품인데 말릴 때는 누가 매번 훔쳐 먹는 것처럼 듬성듬성 자리가 빈다. 수분이 다 말라버리니까 엄청나게 수축해버려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서노의 손을 타니까 채반은 도장병 걸린 머리처럼 휑하니 비기도 한다.


집을 지을 때 독특한 구조로 해놔서 대청마루를 지나 10미터쯤 나무 복도로 된 주랑을 걸으면 화장실이 있다. 이곳은 걸을 때마다 끼운 마루가 들놀아서 삐걱삐걱 거리는 소리가 난다. 양쪽 옆으로는 사각 유리가 끼워진 유리창이 주욱 늘어서 있다. 그런데 여기가 밤에는 적잖게 오싹하다. 바람까지 불면 창틀을 흔드는 소리가 아주 스산하기 그지없다. 바람은 두고 간 어제를 부르는 소리를 내고, 때로 창틀을 흔들어, 별 헤다 죽어간 어린 영혼을 부르는 요령 소리를 내기도 한다.



더욱이 전등을 켜는 스위치가 주랑 시작하는 데 있으면 좋으련만, 화장실에 다 가서 있다. 또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다. 불을 끄고 돌아올 때면 그 주랑 반대편 끝에 달린 야광판을 보고 오는데, 그 야광판이 마치 케르베루스의  눈알같이 게슴츠레하고 걸쩍지근한 빛으로 쳐다본다. 그것을 보고 있는 느낌은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뭉크의 '절규' 같다고 서노는 늘 느꼈다. 어쩌면 저 눈깔이 살아나서 영혼을 발기발기 찢어버릴 것처럼 달려오면 꼭 그렇게 절규할 것만 같았다.


주랑 중간에는 부엌으로 연결되는 간이 문도 있다. 요즘 말로 캐노피를 해놓은 작은 양철 채양 아래 미닫이문을 조르르 열면 부엌이다. 서노가 아주 어릴 때는 장작을 때는 아궁이였는데 초등학교 무렵 연탄아궁이로 개량했다. 안방은 부뚜막이 없는 함실아궁이 형태로 긴 쇠 갈고리를 이용해서 연탄난로를 개자리에 넣었다 뺐다 하도록 되어있다.


작은 방의 아궁이는 붙박이 아궁이라서 늘 커다란 솥이 걸려 있다. 추운 날 아침에는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더운물을 떠서 하늘을 보고 세수를 한다. 서노의 하늘은 시간이 퇴적되면 될수록 쪽빛이 된다. 거기 꿈같은 생각이 머물면 새털구름이 생기고, 아랫마을 누이를 생각하면 뭉게구름이 생긴다.  그래서 하늘은 늘 변화무쌍하고 푸른 가슴에 물들어 시리도록 아름답다.



부엌 위는 안방에서 이어진 벽장인데 세로로 간살을 지른 창살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위에는 벽돌만 한 유리가 네 장 끼워진 창이 하나 있다. 이곳은 서노 할머니의 살림살이가 있는 곳이다. 각종 소반, 사람도 들어갈 만한 뒤주, 옛날에 쓰던 호롱불, 물레, 광주리, 쪽이 나간 찬장, 그리고 서노가 입이 저리게 몰래 퍼먹던 꿀단지도 있다. 그곳에 있는 큰 뒤주를 볼 때마다 사도세자가 저런데서 고통스럽게 죽었겠구나 하고 서노는 생각했다.


그 옆에 굴뚝이 보이는 방이 있다. 그  방이 서노가 쓰던 방이다. 과거에는 그 방을 찬방이라고 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있는데 여기서 상을 봐서 안방으로 가지고 간다.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었으리라고 서노는 짐작했다. 서노가 이방을 쓸 때는 그 문을 막아버려서 사용하지 않았다.


 천정이 유난히 높아서 위풍이 심하고 겨울이면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끼는 방이었지만 서노는 이 방을 유난히 좋아했다. 해가 중천에 뜨면 성에는 녹는다. 녹은 물은 창틀을 타고 조르르 흘러내려 병풍 뒤로 수줍은 몸을 숨긴다. 흘러내린 흔적들은 겨울이 흘린 또 다른 눈물 자국이고 계절의 단층이다.


서노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학시험공부를 한다고 엎드려서 배를 깔고 떡을 주섬주섬 먹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온 식구가 주위에 둘러앉아 있고, 한의사가 대바늘만 한 침을 여러 군데 꼽아놓고 있었다. 곽란이라고 했다. 아마 엎드려서 떡을 먹었던 게 급체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한참을 우시면서 “손자 하나 죽이는 줄 알았다” 하셨다.


시험에 이미 한참이나 늦어버린 서노는 몹시 우둘렁거리며 학교엘 갔다. 시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버려 시험성적은 보나 마나. 게다가 수학 답안지에 답을 써넣을 공간이 작아 조금 위 빈 공간에 이어서 쓰는 바람에, 잘 쓴 답마저 틀렸다고 부욱 그어버린 가로퍼지고 아둔하게 생긴 아줌마 수학선생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교무실까지 씨근벌떡 쫒아가서 대판 대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당시에는 선생이 슈퍼갑이고 학생은 장기판의 졸과 같은 을이다. 그 날은 서노가 완전히 재수 옴 붙어서 시르죽은이가 된 날이다. 역정이 난 판에 하교 길에서 동네 강아지 옆구리만 냅다 차 버렸더니 깨갱 하면서 “저 미친놈이 아무 이유 없이 날 막 차네”하는 눈빛을 하고는 멀찌감치 달아나 버렸다.


이층은 넓은 다다미방, 사진실, 서재, 작은 거실 등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다미방은 말 그대로 일제 강점기 때 유행하는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아놓은 커다란 방이다.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레슬링 흉내를 내는 데는 안성맞춤인 방이다. 서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 계실 때나 가능한 일지만 말이다. 안방 바로 위가 다다미방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쿵쾅거리면 아래에서는 거의 지진이 난다. 그 방은 전망이 좋아서 창문을 열고 보면 샛강이 보이고 아랫동네 초등학교도 보이고 공동묘지도 보인다. 아주 맑은 날에도 공동묘지 송림 아래는 어둑어둑하게 보이는데, 아마도 매해 샛강에서 멱 감다가 빠져 죽은 아이들 그림자가 거기서 서성대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실은 서노 할아버지의 놀이터이다. 과거 할아버지가 사진에 취미를 붙여서 만든 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늘 비아냥거리며 하시는 말씀은

 “사진은 찍으시는데 사진 같은 사진 한 번도 못 봤다”

는 것이다. 그래도 서노의 한량 아버지와 어머니의 60년이 훌쩍 넘은 빛바랜 결혼사진도 바로 그 사진실에서 할아버지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기름 발라 넘긴 아버지의 유려한 머리카락과, 꽃으로 만든 어머니의 머리 장식 화관은 빛이 바랬어도 참으로 인상적이라고 서노는 느꼈다.

 


지금은 하얀 벽이 누렇게 변하고, 모서리마다 시커먼 거미줄만 우중충하게 남아, 옛 기억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회상하면서 사는 것은 때로 시간의 화석을 캐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 지라도... 마들렌이 과자를 차에 적셔먹을 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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