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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Sep 12. 2018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4


서재에는 온갖 고서들이 즐비했다. 서노의 할아버지는 가끔 그 책들을 꺼내서 서노에게 한 자 한 자 짚으며 읽어주셨다. 서노는 귀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주변만 두리번거린다. 뭐가 재미난 것이 없는지 궁금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만 안 계시면 뒨장질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저 온갖 서랍과 서고를 다 열어서 갖고 놀 것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다.


 서재 바닥에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하나 있다. 과거 6. 25 동난 때 서노의 아버지를 숨겨 놓았던 곳이다. 그 공간은 늘 대자리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평상을 올려놓아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곳이다. 또 작은 거실은 서노 할아버지의 명상 장소이다. 양복도 걸어 놓고, 언제 산 것인지도 모를 만큼 탈색된 소파도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고, 태어난 날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포머드는 찌든 기름 냄새를 방안 가득 풍기고 있다.


입구에는 서노의 증조부가 쓰셨다는 각종 지팡이들이 주인을 잃고 우두커니 서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더 이상 주인은 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기다림은 시간의 미학이라고 하지만 이 기다림은 망각의 미학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노의 할아버지는 명상을 할 때 미끈한 여자 모델을 보는 독특한 취향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 방에는 늘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모델 사진이 걸려있다. 그것은 매 달 한 장씩 뜯기고, 또 해가 바뀔 때는 통째로 바뀌는 달력이기도 하다. 이 방의 발코니에 나서면 아치형의 지붕이 바로 위에 있다.


아래층은 안방과 윗방, 그리고 대청, 서노 할아버지의 사무실, 작은 방, 마지막으로 길쭉하게 생겼다고 해서 ‘기차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방이 있다. 안방과 윗방은 삼나무와 한지로 만든 미닫이문이 있다. 그 문의 위쪽에는 나무로 조각된 창호가 있는데, 그 속에 조각가에게 잡혀온 소나무는 더 이상 크지도 못하고, 또 잡혀온 새들은 날지 못하고 뽀얀 먼지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아직도 눈치를 보고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


  안방에는 늘 병풍이 둘러쳐져 있고, 윗방에는 옷을 거는 횃대와 서노의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셨다는 옷장이 있다. 옷장에는 몇 장의 작은 유리가 끼워져 있고 백동 장식 이마받이에다가 대나무 모양의 자개 무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가 대략 100년 전쯤 된 것이다. 이 옷장은 그나마 이 집에 있는 가구 중에 그래도 가장 새로운 스타일이다. 이 집의 가구는 옷장, 반닫이, 소반, 서궤 등의 대부분이 150년에서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대청에는 커다란 뒤주가 있고 뒤꼍과 통하는 커다란 유리문이 있다. 그 유리문을 열면 여름에도 뒤꼍의 대숲에서 나오는 선들선들한 바람이 맞바람으로 통해서 아주 시원하다. 서노는 가끔 대청에서 수박이나 참외를 먹고 벌렁 누워서 흥얼거리다가 배꼽을 내놓고 잠이 든다. 그러면 서노 할머니는 얇은 홑이불을 가져다 배를 덮어 주신다.


서노 할아버지의 사무실 방은 늘 주먹 덩이만 한 신주 열쇠가 채워져 있다. 때문에 할아버지가 그 방에 들어가실 때만 따라 들어갈 수 있다. 그 방에는 커다란 금고가 하나 있다. 그 속에는 카메라와 각종의 서류, 그리고 또 뭔가 중요한 것을 보관한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일력을 떼어서 모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서노 할아버지의 메모장이다. 말하자면 재활용하는 것이다. 그 이면지에는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빼곡하게 적어놓는다. 하루 내 무엇을 먹었는지, 누가 돈을 얼마나 뜯어갔는지, 누가 왔다 갔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하나도 빠짐이 없다.


그 방에는 각종의 연장과 필요한 부품이 즐비하다. 그렇지만 서노의 할아버지는 그 연장 중에 단 한 개라도 다룰 줄 아는 게 없다. 어느 날 서노는 할아버지한테 물었다,

“이 방에 없는 게 뭐 있나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하고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 응. 처녀 불알 빼고는 다 있다”



작은 방은 서노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 그의 아버지가 시골집에 내려오면 묵는 방이다. 서노는 그의 아버지와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자주 보지도 못했고, 또 그의 아버지가 살갑게 챙겨봐 주지도 않았다. 하긴 서노의 아버지는 한량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살면서 돈이 떨어지면 서노의 할아버지한테 돈을 어찌어찌 받아내려온다. 산 팔고 밭 팔고 그래서 없앤 것들이 꽤나 많았다. 할아버지가 돈을 주지 않으면 할머니의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간다. 그리고 또 나가면 한동안 오리무중이다. 그러니 서노가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고운 눈으로 볼 리가 없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겨울날 서노의 아버지는 흰 눈을 밟으며 또 홀연히 나타났다. 할머니는 서노에게 작은 방에 장작을 좀 때서 따뜻하게 아버지가 잘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부아가 치민 서노는 장작 중에 제일 굵고 큰 놈만 골라서 아궁이에 넣고 엄청나게 군불을 때 버렸다. 어마어마한 화력에 구들장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이불이 시꺼멓게 타버렸으니, 발편잠은커녕 타버린 이불 하며 여러 가지로 좀 걱정이 되었는지 그의 아버지는 새벽에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고 서울로 가버렸다.


서노는 내심 그랬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모른 척 시치미 떼고는 가방 들고 얼른 학교로 가버렸다. 등굣길의 하늘은 그렇게 푸를 수가 없고, 산천의 순백색 눈은 가슴속의 뜨거운 아궁이를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코발트색에 가까운 하늘, 바로 그 짙은 '남색은 희망을 가진 여신의 모습'이라는 어디선가 읽은 글을 떠올리며, 서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발맘발맘 발을 떼었다.



기차 방은 늘 비워져 있다. 가끔 멀리서 손님이 오면 방을 청소하고 그곳에서 머물게 한다. 바로 앞은 세면장이다. 커다란 거울이 거기 겨울 까치처럼  덩그마니 걸려있다. 거울의 모서리는 시간이 잠을 자고 간 흔적을 남긴다. 누렇게 뒤가 벗겨지고 고정시킨 고리는 벌겋게 녹이 올랐다. 서노는 홀랑 깎은 머리를 거울에 들이밀며 조금씩 짙어져 가는 콧수염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리고는 옆 창문을 열고 맥없이 침을 퇴 뱉어서 얼마나 멀리 가는지 객쩍은 짓을 하곤 한다.


그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기와집과 연결된 쪽문과 배추밭, 다른 여러 그루 은행나무들과 동떨어져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그리고 동쪽 하늘에서 넘어오는 하얀 뭉게구름이다. 뭉게구름은 늘 새로운 꿈을 주는 구름이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매지구름으로 시커멓게 변해서 머흘머흘 다가와  심술궂은 비를 세차게 뿌리기도 한다. 그래서 서노는 그 뭉게구름의 꿈이 돈키호테의 꿈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는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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