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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Sep 15. 2018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7


  서노의 할아버지는 흥정할 제수용품의 품목을 빼곡하게 적은 일력 뒷장을 들고 코 접어 부서진 흰 왕골 중절모를 쓰고 나서신다. 읍내로 나가는 길 저 멀리 기차 경적 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오고, 건널목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땡땡거리는 경보음 소리가 달려온다.

그것은 누군가는 오고 또 누군가는 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또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은 헤어지고 헤어진 사람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간 후에는 만난 사람도 헤어진 사람도 모두 자신이 태어난 별자리로 돌아가고 새로운 별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 그래서 별은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느라 수없이 반짝이는 것이다.


  이 철도 건널목을 건너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따라 15분쯤 걸으면 읍내로 들어간다. 서노의 할아버지는 차가 지나갈 때마다 뿌옇게 날리는 흙먼지를 막으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읍내로 들어서면 읍사무소와 경찰서를 지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에  가장 먼저 들른다. 흥정을 하려면 현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행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에는 아주 오래된 중앙초등학교가 있다.


 
 이 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최초로 신사 참배 거부운동이 일어난 유서 깊은 학교다. 1924년 10월 11일 당시 명칭이었던 강경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은 전국 어디나 동일하였듯이 강제로 신사 참배에 동원되었다. 이 날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 신자의 학생 26명은 결석을 하고, 동원되었던 40여 명의 일반 학생들도 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을 주도한 김복희 여교사는 해직되고 학생들은 퇴학당했다. 당시로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신사 참배 거부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지금은 강경 성결교회 앞에 신사 참배 거부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중앙초등학교를 지나 오 분쯤 걸어가면 은행이다. 이 은행 건물은 1905년 조선인들의 민간 자본 50 만환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다. 당시의 명칭은 한호 농공은행 강경지점이라고 한다. 일제가 세운 은행도 있었는데 수신고가 거의 엇비슷했다는 기록도 있다.  애석하게도 조선의 민간 자본으로 세워진 이 은행은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본격적으로 수탈하면서 강제로 빼앗아 조선 식산은행으로 만들었다. 해방이 된 이후에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다시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개편되면서 격변하는 시대에 강경의 상권을 묵묵히 지켜봐 오는 것과 동시에 쇠락의 동병상련을 함께 겪었다.


  
서노가 중학생일 때는 충청은행이었는데, 거기 얼굴이 동그랗고 호수처럼 눈이 맑아 아주 예뻐 보이는 누이가 근무했다. 시골 은행에 다니는 여직원 치고는 서울 사람 못지않게 세련되고 멋을 아는 누이였다.  누이는 대략 일곱 여덟 살이 많다. 누이는 광석면 어디에 산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 누이는 어쩌다 서노를  찾아오기도 했다. 여름 어느 날 처음으로 서노네 집을 찾아왔을 때 짧고 하얀 미니스커트를 입고 꽃띠 모양의 가느다란 줄로 발등을 고정시킨  샌들형 하이힐을 신고 왔다. 시골 촌구석에 나타난 그 모습은 거의 여신이나 다름없었다. 서노 할아버지는  젊고 예쁘장한 아가씨가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사진을 찍어 주시겠다고 혼자 바쁘셨다. 누이와 사진을 찍을 때 누이는 서노를 가까이 끌어안았고, 누이와 스치는 느낌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좋아 죽을 지경이었는데, 마치 아무 느낌도 개념도 없는 어린아이인 듯 태연한 척했다. 내심 킥킥 거리면서...


  서노는 방과 후에 가끔 그 누이를 찾아갔다.  누이는 늘 서노를 데리고 은행 앞에 있는 제과점으로 가서 친동생처럼 살뜰하게 챙긴다. 짙은 밤색의 팥이 부드럽게 씹히는 단팥빵, 대가리에 과자를 다닥다닥 붙이고 있는  곰보빵, 크림을 하나 가득 넣어 배를 맞붙여 놓은 크림빵 등 여러 가지 빵들이 한가득,  그리고 누이의 살결처럼  뽀얀 색의 우유가 테이블에 올려진다.



하지만 서노는 그 누이의 봉긋한 가슴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설렘이 있었고, 또 살색 스타킹을 신은 은제 주각 같은 다리를 꼭 만져보고 쓰다듬어 보고 비벼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개꿈이었다. 사실 나이가 좀 많은 누이들은 서노만 한 남자아이들은  고추도 안 달고 사는 줄 안다. 남자는 중학생만 되면 애 아니면 개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사실 서노와 은행 누이는 별반 재미있거나 가슴이 뛰는 관계는 아니었다. 나이 차이가 워낙 많다고 서노가 생각했기 때문에 가끔 찾아가서 예쁜 얼굴과 미끈한 다리를 보고 빵이나 얻어먹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첫사랑 같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첫사랑은 한  두 해가  더 지나서 슬그머니 찾아온다.

  
은행에서 나와 황산 시장으로 가려면 은행 맞은편 골목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이곳을 지날 때 길쭉하게 지어진 강경 노동조합건물을 만난다. 강경에서 노동조합이 생긴 것은 대략 1915년 경이다. 침탈과 착취를 일삼는 일본 자본에 맞서 노동 야학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고, 객주와 하역 노동자들이 모여서 본격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동조합 건물을 지어서 옮긴 것은 1925년이다. 처음에 지었을 때는 2층 목조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1층만이 남아있다.


 
 황산 시장은 버스터미널 뒤에 있다. 말이 버스터미널이지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그래도 그 터미널에서 공주, 논산, 부여, 대전, 익산, 전주 등지는 물론 면 소재지까지 가는 지선버스들도 있다. 서노는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논산에 있는 중학교를 다닌다. 터미널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젓갈의 비릿하고 짠 냄새가 얼른 먼저 아는 척을 한다. 그게 시장이 보내는 첫인사인 셈이다. 커다란 드럼통마다 각종 젓갈이 가득하다. 그중 새우젓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날카로운 발이 몇 개 달린 커다란 삼지창은 젓갈 파는 주인 손에 전투적으로 들려있다.


여기저기서 부산한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누런 광목 천막이 가득하다. 한여름에는 햇살이 천막과 천막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행인의 얼굴에 따가운 바늘을 끝없이 꼽아댄다. 대패질도 안 된 사과상자 위에는 한여름 폭양에 그을린 아버지들의 땀방울이 얹혀있고, 쪼그려 앉은 어머니들의 광주리마다 들판 한가운데 놓인 고단한 삶의 궤적들이 담겨있다. 그들의 얼굴에 깊게 골이 패인 주름과 까맣게 그을린 손등 위로 강경의 느린 구름이 지나가고 있고, 금강에서 두리번거리며 읍내를 찾아온 강바람이 스친다.


서노는 장난기 어린 손으로 좌판 위에 나란히 늘어져 자고 있는 자반고등어를 콕콕 찔러본다. 짭조름하고 비릿한 냄새는 서노가 집에 돌아가서 손을 씻을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시장 안에는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자를 수 없도록 만든 너부데데하고 멍청한  가위가 절겅절겅 소리를 내고, 대패로 호박엿을 깎아 대패밥처럼 만든 뒤 나무젓가락에 끼워  주기도 한다. 걸을 때마다 발에 매달린 북채가 북을 소란스레 두드리며, 강경 극장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사랑을 한다’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매부리코 가면의 콧수염은 쌩 난리굿을 벌인다. 새로 나온 고무줄은 러닝셔츠와 팬티를 여러 번 삶아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쌩 구라를 수없이 잡아당겼다 놨다 하고 있다.


나프탈렌과 좀약을 파는 조그만 수레는 쥐 잡는 끈끈이 신제품이 나왔다고 연신 떠들어댄다. 사실 밥에 섞어 놓는 쥐약은 동네 똥개들이 먹고 수없이 죽어나갔다.  그래서 끈끈이 쥐약이 좋다는 것이다. 아무튼 개가 죽은 날 동네 청년들은 뒷산에 가서 죽은 개를 불에 그을러 털을 모두 태우고, 그 개는 새까만 숯덩어리가 되어서 손에 들려 내려온다.


 스님은 상점마다 들어가서 목탁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손에 흰 붕대를 칭칭 두른 나병 환자는 스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느 상점이 후하게 보시를 하는지 살핀다. 그들은 전라도로 가는 중에 노자돈이 떨어져 황산 시장에 들른 것이다. 서노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1949년 시인 한하운은 천형이라는 병으로 신음하는 그들을 이렇게 썼다. 그 역시 나병으로 고통받았다.


<전라도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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