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호 Sep 16. 2018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8


제수용품 흥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잣디’라는 별칭의 아랫마을을 지나온다. 아랫마을은 한 뼘이 안 되는 높이의 납작한 나무 상자 수백 개에 담겨 온 엄청난 양의 황새기를 분쇄기로 갈아서 손바닥만 한 어묵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또 키가 껑충하게 생긴 목조 방앗간도 있다. 방앗간 옆에는 늘 누런 왕겨가 산처럼 쌓여있다. 그리고 동네 마실 나온 닭들과 병아리들이 발톱으로 왕겨를 헤집으며 연신 뭔가를 쫀다.


  그 방앗간을 지나기 전, 한길 가에 대문을 미닫이문으로 만든 집이 있다. 문에는 위쪽에 사각 소반만 한 유리가 네 장 끼워져 있다. 하지만 그 유리는 흙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어서 유리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또 그 미닫이 대문에는 비 오는 날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흩뿌려 놓은 크고 작은 진흙 덩어리만 무심하게 눌어붙어 있다.  하지만 서노는 나중에 자신의 마음이 진흙처럼 송진처럼 거기 그렇게  끈적하게 눌어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집의 지붕은 붉은색 양철지붕이었지만 색이 바래서 늘 붉으죽죽하면서도 우중충했다. 바로 이 집에 누이가 산다. 처음 누이를 만난 것은 누이의 언니 때문이다. 서노가 하교할 때는 논산에서 강경으로 버스를 타고 온 뒤, 강경경찰서 앞에서 내린다. 그리고  신작로를 따라 걸어 들어온다. 이때 가끔 만나는 누이가 하나 있다. 그 누이는 논산에 있는 여자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종종 하굣길에서 만난다. 누이의 생김새는 약간 너부데데했지만 늘 서노에게 살가웠다. 확실히 이 무렵만 해도 누이들이 서노를 꽤나 곰살맞게 본 것 같다.


  서노가 3학년이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둘이 만나,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걸어 들어오던 중이었다. 누이는 갑자기

 "우리 집에 들러서 시원한 것 한 모금 마시고, 동생도 한 번 보고 가"

  라고 뜬금없는 말을 한다. 동생을 한 번 보고 가라 한 것은 그저 인사 정도나 하고 가라는 것이었는지, 친구로 소개를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는지, 그도 저도 아니면 아무 개념 없이 던진 말인지는 분명치가 않으나, 서노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붉은 양철 지붕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중국어에는 ‘이지엔종칭(一見鍾情)’이란 말이 있다. 즉 한눈에 꽂혔다는  말이다. 누이가 문에 눌어붙은 흙이 손에 묻을까 싶어 손가락으로  지그시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섰고 서노는 뒤를 따랐다.  땅에서 한 뼘쯤 높은 문턱을 넘었다. 그곳에는 단발머리에 아주 똘망똘망하게 눈매가 고운 여학생이 방 안에 있다가 눈을 돌려 서노를 보았다. 그 순간 서노는 발걸음을 멈추고 얼음처럼 그 자리에 서버렸다. 그 여학생이 있는 방은 전등을 켠 것도 아닌데 훤하게 방이 밝아 보였다. 서노는 그 여학생이 시쳇말로 자체 발광을 하는 게 아닌가 놀랐다. 아니면 그 방에 여학생 미인도를 걸어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10여 초가 지났을까. 서노는 정신을 차리고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마주 보던 여학생도 빙긋 웃었다. 그리고 너부데데 누이가 서로 인사를 시킨다. 어쩌고 저쩌고 주절주절 뭐라고 해댄다. 둘은 바보가 도 트이는 것처럼 마주 보고 송충이가 대가리 내흔들 듯 고개만 끄덕였다. 말이 끝나자 서노는 한동안 읍사무소에 잡아다 놓은 닭처럼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참 일이 안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했다. 그 여학생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서노 보다 1년 선배인 셈이다. 이상한 것은 너부데데 누이는 말 그대로 너부데데하고 피부도 약간 검은 편이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계란처럼 갸름한 얼굴에다가 아주 뽀얀 살결을 가졌다. 서노는 생각했다. 자매지간인데 이렇게 다른 이유는 아버지가 서로 다른 때문일지 모른다고. 아니면 어머니가 다를 수도 있다고. 그도 저도 아니면 같은 공장에서도 제품 생산 중에 불량품이 나오는  이치처럼 처음 생산된 제품이 불량품이었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문여리'라는 말이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냐는 것이다. 어찌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 빠져 들 것만 같은 투명한 눈매가 서노의 가슴속에 들어와 명적(鳴鏑)처럼 콱 박혀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여학생은 서노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아주 친절하고 더없이 살갑게 군다. 뿐만 아니라  너부데데 누이 보다도 말에 교양이 있어 보이고 차분하기까지 하다. 서노의 머리는 이제 엄청나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누워도 눈에 보이고, 서도 눈에 어른거리고, 걸을 때도 뒤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노는 그 여학생을 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누이와 서노는 이제 풋사랑 이야기를 한동안 만들어 간다. 서노는 이때부터 동정 못 다는 며느리 맹물 발라 머리 빗듯 꼴 같지 않은 멋을 내기 시작했다.


   
한편 안방의 다락문이 열리고 광주리에 담긴 놋 제기들이 절그럭 소리를 내며 들려 나온다. 누런 방자 제기들은 녹이 올라 거무튀튀한 옷을 입고 있다. 이제 발가벗길 일이 남았다. 제기들은 우물로 가서 모래와 뭉쳐진 짚으로 사정없이 껍질이 벗겨진다. 모래가 닿아 씻긴 곳마다 세로로 가로로 반짝이는 줄들이 생긴다. 그 일은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제기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반짝거리는 모래 상처가 광택으로 바뀐다. 때 빼고 광 낸 것이다. 서노는 이 일을 할 때면 살짝 밖으로 마실을 나갔다가 다 끝날 때쯤 빼꼼히 문을 열고 들아온다. 핑계는 이렇다. 일하는데 걸치적 거리지 않으려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엌에서는 집안에 있는 모든 화력이 동원된다. 메와 갱과 나물, 산적, 전, 생선 등 꽤나 많은 제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광 옆에 있는 노천 화덕에서는 국 같은 것이 허연 수증기를 연신 뿜어대고 있고, 그 흰 수증기는 하늘로 올라가 병아리 털 구름이 된다. 방안에서는 머리가 저며진 과일들이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얇은 대나무 꿰임에 허리가 꿰여 과접에 올려지고, 하루 내 부엌 바닥에서 전을 부친 할머니의 고단함은 전접 끝으로 내려앉는다.


 뿌연 물속에 담긴 한 됫박의 밤은 하얀 몸을 드러내면서 서노 어머니의 손도 하얗게 불려버린다. 그 손으로 숙채를 버무릴 때 손톱 끝마다 장이 닿아 아리고 쓰리다. 편틀에 올린 떡의 영혼은 모락모락 머리를 풀고 하늘로 올라가고, 물 뺀 식혜에는 여섯 쪽 대추가 꽃으로 핀다. 다음날 서노의 도시락에 들어갈 산적은 적틀에 올라앉아 고기 냄새를 풍기면서 이 동네 저 동네 파리들을 죄 끌어 모은다.



  총총한 별이 서면 엊저녁에 할머니 은장도로 서노가 곱게 깎은 향나무 조각들이 향안 위의 향합에서 나온다. 향나무의 독특한 냄새는 연필 깎아놓은 향내를 풍긴다. 그리고 놋쇠로 된 향로로 들어가 제 몸을 사른다. 귀신을 부른다는 향나무 타는 냄새는 향로 뚜껑의 봉황 무늬 구멍 사이로 스멀스멀 나온다. 그리고 까만 교의에 달린 날씬한 다리를 타고 올라 어두운 밤공기로 흩는다.


신주의 독개가 열리고 모사기에 제주가 세 번 부어진다. 하얀  모래는 제주를 먼저 마시고 누리끼리한 모래의 색으로 변한다. 도포 자락에서 꺼낸 제문에 촛불을 가져다 대면 “유세차 모월 모시...”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서노의 증조부 제사 때 할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시기도 한다. 서노는 곁눈질로 흘끔 거리면서 할아버지를 살핀다. 눈물은 사실 병아리 눈물만큼 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멀리서 밤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련히 들리고, 내일을 향해 달리는 어둠은 캄캄한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더 많이 불러 모은다.


반갱기 뚜껑이 열리면 조르르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이슬. 그리고 메와 시접에 삽시정저 한다. 배례를 할 때마다 할아버지의 도포자락은 끊임없이 부스럭거리고, 들노는 우물마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고요한 밤의 정적을 밀어낸다. 배례를 마치면 마당으로 나온다. 여름에는 피워놓은 모깃불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춤을 춘다. 가까운 곳에서는 여치들의 울음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달려오고, 멀리서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의 뭇별들을 따라간다.


  또 겨울에는 움츠러든 살품 속으로 냉기가 쫒아 들어오고, 내리는 눈 위로 또 눈이 소복하게 내려 쌓인다. 깊은 밤 머리를 들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 눈도 잊고 서노 자신도 잊고 시간도 잊는다. 그렇게 밤의 몽환은 깊어 깊어간다.

 숭늉을 올리고 메에 꽂혀있던 수저를 빼서 숭늉에 두어 번 젖는다. 찰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의 뚜껑이 덮인다.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말하는 배례 소리에 따라 마지막 배례를 마친다.


늦은 밤에 김을 잘게 찢어 넣은 갱에 메를 넣어 말아먹는 젯밥은 유난히 맛이 있다. 그래서 서노는 ‘염불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말이 더 실감 나기도 했다. 또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는 말도 이래서 나온 말인가 보다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