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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Sep 17. 2018

강경의 느린 구름 아래에서 9


  서노의 삼촌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 전 강경 집에 내려와서 한 이년 동안 군 복무를 했다. 군 복무라고는 하지만 도시락 싸들고 시계불알처럼 읍사무소를 왔다 갔다 하는 방위 복무를 한 것이다. 서노의 삼촌은 시력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학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삼대독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검사에서 3급 보충역으로 판정받은 것은 헐크 같은 외모이거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외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조폭처럼 온몸에 용 문신이나 꽃 문신이 있어서 일까? 아무튼 그건 더더욱 아니다. 대위 보다 높은 방위가 된 것은 순전히 할머니의 지극한 로비 활동 때문이다.


  로비의 방법은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모르나 아무튼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하고 실탄을 곁들여서 해결했다. 물론 실탄을 만드는 자금은 할아버지 주머니에서 나왔는데 그 실탄 자금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툼이 있기도 했다. 엄밀히 보면 다툼이 아니고 할머니의 일방적 승리라고 보는 게 맞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전투 체급도 다르고, 랭킹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들을 군에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할머니의 군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서노의 할머니는 큰 아들이 있었지만, 중위로 군 복무 후 바로 사망했다. 사인은 정확하지 않다. 당시의 진료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군 복무 중에 심한 복부 통증이 계속되어 전역을 신청했다. 그리고 입원하여 수술하던 과정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아들은 군대를 가면 죽는다’는 공식이 할머니 뇌리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또 6.25와 같은 가슴 아픈 동족상잔을 지켜봐 왔고, 또 수많은 아들들을 부모의 가슴에 묻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화로울 때는 자식이 아비를 묻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아비가 자식을 묻는 게 세상 이치이다. 그래서 일찍이 서노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치열하고도 총력적인 로비활동으로, 아예 군대를 가지 않았다. 176 센티미터의 키에 시력은 1.0이며 대학 재학생에다가 삼대독자도 아닌데, 징집 면제를 받은 데는 아마도 엄청난 로비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해낸 원더우먼이다.


 
 그 바람에 서노 아버지는 본래 한량 기질이 있던 데다가 군대에 가서 고생도 한 번 안 해 본 때문에, 이른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량’이 된 것이다. 사실 한량이 되는 기질은 몇 가지 인자가 필요하다. 우선 한량이 되려면 아버지가 돈이 많아야 한다. 둘째 오만 잡놈 친구가 많아야 한다. 셋째 심성이 착해서 네 것 내 것과 같은 소유의 개념이 희박해야 한다. 넷째 술을 좋아해야 하고 주량도 남달라야 한다. 서노의 아버지는 이 네 가지를 아주 적절히 잘 지녔다.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집만 나서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어려운 사람에게 다 털어주거나, 친구 꼬임에 빠져서 모두 탕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 올 때는 헐벗은 거지한테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년이 되어서도 이 버릇이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술집과 투전판에서 더 신나게 놀다 온다는 것이다. 서노의 할아버지는 요정에서 받으러 온 아들의 외상 술값에 아주 치를 떠셨다. 또 서노의 아버지는 두주불사의 주량으로 소문났다. 하지만 세상에는  ‘알코올 총량제’라는 법칙이 있다. 평생 자신이 마실 알코올의 양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해진 양을 초기에 빨리 많이 마시면 일찍 가는 것이다. 서노 아버지는 ‘알코올 총량제’에 걸려서 간암 판정을 받았고, 결국 장수하지는 못했다.


  반면 서노의 삼촌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말수가 적은 범생이다. 아무튼 삼촌은 기차 방에서 한 이년을 도시락 싸가지고 군대를 다녔다. 어쩌면 G.P. 나 G.O.P.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볼 때, 도시락 군인은 군대를 간 것이 아니라 매일 소풍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시기에 서노는 삼촌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당시 삼촌이 읽던 책을 자주 서노가 읽었다. 물론 두껍고 어려운 책은 아니다. 가져다 읽은 책은 문고판의 작은 책 수십 권이다. 읽기도 쉽고 또 가지고 다니기도 쉬웠다.



  그중에서 생각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책이 두어 권 있다. 첫 번째 책은 을유 문고사에서 발행한 <노자도덕경>이다. 손바닥 만 한 이 책은 사고체계에 있어서 그동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줬다. 사실 노자도덕경이라 봐야 페이지도 몇 페이지 안 되고 또 글자도 몇 개 없다. 어찌 보면 풍신 나지도 않은 책이다. 크기가 큼지막 하기를 하나  페이지 수가 많아서 두껍기를 하나 양장본이라 딱딱하고 폼이라도 나기를 하나. 그 아무것도 해당이 안된다.  그러나 그 몇 페이지 몇 글자가 까까머리 서노의 머리를 홍두깨로 한 방 크게 때린 것이다. 그 놀라운 많은 내용 가운데 가장 경이로웠던 것은 바로 11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통에 모여 있으니

그 없음에 쓰임이 있다.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니

그 없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집을 만드니

그 없음에 집의 쓰임이 있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다시 말해서 빈 공간이 없으면 바퀴의 살을 세울 수 없어서 쓸 모가 없고, 빈 공간이 없다면 그릇의 용도로 쓸 수 없으며, 집 역시 빈 공간을 이용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제 아무리 아름다운 그릇도 빈 공간을 쓰기 위함이지 껍데기를 쓰기 위함이 아니며, 화려한 집도 공간을 쓰기 위함이니 외형에 지나치게 사치와 낭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숨어있는 것처럼 느꼈다.


  서노가 감명 깊게 읽은 또 하나의 책은 헤밍웨이의 <부와 빈>이라는 소설이다. 이 역시 손바닥만 한 문고판이다. 소설의 내용은 미국 동남해안 플로리다에서 쿠바 사이로 배를 몰며 술과 소총 등을 밀수하는 해리 모건이라는 인물의 굴곡진 생활상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에 서노는 극과 극의 경제적 부조리에 대한 사회상을 그린 이 작품을 읽고, 또 다른 생각의 영역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서노가 고귀해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헤밍웨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 타인보다 우수하다고 고귀한 것이 아니다. 진정 고귀한 것은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해질 때 그것이 고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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