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기
1. 대서양의 시간이 말을 건네는 나라
포르투갈
영종대교 가득 감싼 안개를 뚫고 짧은 고가를 올라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차에서 내린다. 시커먼 가방 하나를 강아지처럼 달달 끌고 줄을 선다. 차분한 목소리의 꾸냥은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흰 종이를 두 장 끊어준다. 대신 도베르망같이 생긴 시커먼 가방을 받아준다. 흰 목줄을 손잡이에 채워서. 공항 라운지 카페트에는 벽돌 무늬들이 누워있다. 창 너머 찬 공기는 비행기 날개 위에 앉고 일상화된 웃음이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꾸냥들이 줄지어 있다. 멀뚱한 눈이 연회색 플라스틱 벽들의 무표정한 모습에 기대어 있을 때 불편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선율들이 천장에서 미끄러져 나온다. 뜸들이는 시간이 지나자 생각했던 것보다 그다지 시끄럽지 않은 소리와 함께 몸은 정원이 495명이나 되는 A380라는 알루미늄 덩어리와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다.
열 대여섯 시간이라는 아무 재미도 의미도 없는 지루한 시간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다. 이런 지겨운 시간의 나열이 싫어서 몇 번의 장거리 여행의 기회도 다 던져버렸는데 이번에는 묘한 계기로 지루함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고 말았다. 덩치 큰 닭 가슴살 하나와 찌질한 야채들, 화이트 와인 한 잔 그리고 티라미슈 한 조각이 테이블 위에 덩그마니 놓여 있다. 가끔씩 전체를 흔들는 진동은 지금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각성시켜 주는 듯하다. 2m가 넘어 보이는 공간이 앞에 비어있는 덕분에 덜 답답하고 별로 길지않은 발을 마음놓고 뻗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머리카락을 침 발라서 머리에 딱 붙여놓은 꾸냥이 수시로 물과 오렌지 쥬스를 들이 밀지만 화장실이 가기 싫어서 그냥 거절하고 만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핸드폰의 노트에 구질구질 늘어놓는 짓을 하거나, 푸푸 소리를 내며 빛을 맞는 꿈을 꾸거나, 옆 머리에 꽃 꽂아놓고 알아 듣지 못하는 안드로메다의 언어를 구사하는 동막골 처녀처럼 멍 때리기를 하거나, 날이면 날마다 뺑뺑 돌아가는 영화를 킬링 타임용으로 보거나 해야한다. 무려 세 편이나 봤다.
어디를 가나 목 옆의 혹 주머니에 수다를 꼭 가지고 다니는 아줌마 트룹스의 부류는 조금의 공간만 있으면 차지하고서 생전 보지도 못했던 패키지 여행객 일행을 보고 그저 신랑이 우짜고 저짜고 밥을 안해서 좋고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 댄다. 참으로 친화력도 뛰어나다. 듣는 사람이 맞장구를 치면 수다가 길어지고 맞장구를 치지 않아도 수다는 한동안 계속 된다. 누가 물어나 봤나. 침 발라 붙인 머리의 높이가 높은 꾸냥의 제지라도 있으니 그나마 제 자리로 모두 돌아간다. 침 발라 붙인 머리가 위로 솟아서 이른바 약간의 뽕이 생기면 고참이고 아주 찰떡처럼 바짝 이마에 붙어있으면 신참급이라는 전설이 있다. 근데 그게 사실에 가깝다고 한다.
지겨우니까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장거리 비행으로 시작하는 여행은 어쩌면 삶의 불랙홀일지도 모른다. 정답은 아니지만 아무튼 탑승 지역과 내리는 지역은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는 진짜 불랙홀은 아닐지라도 시간의 편차가 생기고 장소도 달라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 엄밀히 말해서 블랙홀은 시간과 공간이 일그러진 공간을 의미하는데, 도착하는 곳은 탑승한 곳과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도 일그러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우겨보고 싶다. 아울러 블랙홀에서는 질량은 그대로 있으면서 부피가 극한으로 줄어들면 밀도가 높아지며 그 물질이 점유하는 공간의 중력이 극대화한다. 비행기를 타면 있던 곳에서 존재하던 내 몸의 질량은 일정하나 있던 곳에서의 부피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높이 날고 있으니 위치에너지가 극대화된다. 이것을 중력의 극대화로 볼 수 있을까 없을까. 없으면 할 수 없고 ...
이번에는 약간 타당성있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미지의 여행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또 과거의 회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지에서 새로운 문화와 예술과 정서를 느끼고, 또 먹고 잠자고 말하고 하기도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옛날 이야기를 한가롭게 회상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어디를 갈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먹고 그 맛은 어떨까 새로운 숙소는 어떻게 느껴질까 등등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예정된 여행에 대한 내용을 생각하고 기억하기 바쁘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것에 대한 기억을 이른바 '미래 기억'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이 미래 기억에 할애하는 시간은 줄고, 대신 '과거 기억'에 대한 회상 시간이 늘어난다고 한다. 이는 정신적 노화의 징후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있었던 일에 더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 나이들게 하지 않으려면 늘 창조적인 일을 해야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중의 하나로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즉 여행은 노화의 징후와 정 반대가 되는 '미래 기억'에서 지내게 되는 또 다른 블랙홀의 시간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노의 생각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