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딸의 관계에 집밥이 미치는 영향
엄마가 만든 진미채가 부녀 관계에 미치는 영향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찌질한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파릇파릇한 새내기의 삶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딸의 모습을 신기해하면서도 딸과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아내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습관으로 인해 대놓고 그 신기함을 표현할 수는 없었던 아버지가 있었다.
하루는 두 어색한 부녀 사이에 기념비적인 관계 변화의 계기를 불러온 사건이 발생한다. 여느날처럼 어머니가 차려놓은 식사를 하다가 아버지는 딸에게 평소에는 하지않던 스킨십을 시전한다. 딸에게 어깨동무를 한 것이다. 그에 대해 딸은
"뭐하는 거야? 꺼져!"
라고 반응하며 아버지의 애정표현에 호전적인 태도를 보인다. 순간 분위기는 싸해질 수 밖에 없었고, 딸은 자신이 망쳐놓은 이 저녁 식사를 더 이상 망치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왜 안하던 짓을 해. 오늘 진미채 맛있네. 이걸로 안주 삼을라니까 나 맥주 한 잔만 주시지요, 아버지."
라고 하며 상황을 수습한다. 다행히 아버지는 반쯤 술에 취해 있었기에 스킨십은 거부당했으나, 딸과 처음 술을 마셔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기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아빠와 내가 서로를 제일 많이 닮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가족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는 아빠에 불만이 많은 편이었고, 술에 힘을 빌려 맨정신에는 하지 못할 얘기들을 마구 쏟아내는 아버지의 행동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던 딸이었다. 그러니 아빠와 스킨십을 한다는 것은 20년 인생에서 생각하기 싫은 행위였고, 아빠가 술에 취해 성인이 된 딸에 모습에 신기함을 참지 못하고 어깨동무를 하자,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반감이 뚫고 올라와 격한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 때를 회상하면, 그 때,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진미채가 없었다면 도대체 엄마가 해준 음식에서 무엇을 안주핑계 삼아 아빠와 술을 마실 생각을 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색한 부녀 관계에서 엄마는 꽤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선, 딸과 남편에게 매일매일 집밥을 챙겨줘야 했던 전업주부였던 그녀는 그 사건 당일 날에도 열심히 집밥을 해서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에게 먹이던 중이었고, 그녀에게는 평소와는 하나도 다르지 않던 날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딸의 반응은 엄마를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할 만큼의 파급력이 있었다. 딸이 알게모르게 집안의 잔재로 남아있던 가부장제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부장제는 여자가 살림을 도맡아해야한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아버지의 가치관과 딸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 날 딸인 나는 그 가부장제에 격한 언어로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무신경하게.
하지만 해결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쿨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밥상에 놓여진 엄마가 해준 진미채와 맥주가 꽤나 좋은 궁합을 보여줄 것이란 생각을 그 난감한 상황 속에서 빠르게 하였고, 진미채를 안주삼아 먹을 술을 아빠에게 요구했다. 아빠는 술을 좋아하니, 술과 관련해 화제를 돌리면 나아질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다시 화기애애해졌으며, 그 이후로 아빠와 나는 어색한 듯하지만 티격태격 쓸데없는 주제로 수다를 떠는 술친구가 되었다. 친한 듯 친하지 않은 기묘한 사이. 아빠와 함께 먹는 술판은 대부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위에서 벌어진다. 성인이 되어 나에게 집밥이란 엄마의 메뉴 선정의 노력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형성이고, 10대때에는 미처 쌓지 못했던 아빠와의 친목을 다지게 되는 음주의 장이고, 안주의 역할을 한다.
가부장제에 도전한 쌈닭 딸도, 아직 꽉막힌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도 잠시 휴전하고,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다. 어색하고, 아직 완성되진 않은 가정의 모습이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모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가 서로가 가진 이질적인 세계를 뚫고 잠시나마 웃으며 시간을 공유하는 시간은 역시 밥을 먹는 시간인가 보다. 어색한 사람과 밥을 먹고 있다면 밥상 위에서 객기를 부려보는 것도 다소 나쁘지 않다. 그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상황은 봐가면서 객기부리시라. 나에겐 진미채가 있었으니 다행이지, 내가 벌인 상황은 아빠와 싸우자고 덤비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