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직딩 May 05. 2019

'한 입만'의 미학

한 입만의 味學, 그리고  美學

라면이 가장 맛있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물론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옆 사람이 먹는 라면을 한 입만 먹을 때의 그 맛은 언제 먹는 라면보다 맛있습니다. 


동시에 라면을 먹을 때 누가 옆에서 라면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참 얄밉습니다. 집에서 라면을 끓일 때 먼저 묻습니다. “지금 라면 끓일 건데 혹시 먹을 거야?” 상대방은 대답합니다. “난 별로 생각이 없네. 안 먹을래.” 딱 내가 먹을 분량의 라면만 끓여서 먹기 시작하면 상대방은 어느새 내 옆에 와있습니다. 

“맛있어?”

“응"

“...... 나 한 입만"


한 입만 빼앗아 먹는 라면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빼앗기는 사람은 정말 열불이 납니다. 라면 한 입이 뭐라고 말입니다.


한 입만 먹겠다고 해놓고 다 먹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실 반응 "야아아~!!!" (출처 : 러닝맨)




저는 한 입만 이라는 말을 꽤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제 모습을 ‘발견'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누군가 내게 ‘한 입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에 가까웠기 때문이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려 볼 때 ‘한 입만' 문화가 가장 보편적이었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든, 떡꼬치를 먹든, 나를 보는 친구들은 내게 ‘한 입만'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냥 너 다 먹어.” 하며 내가 먹고 있던 것을 다 주곤 했죠. 왜 그랬는지는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친구의 침이 묻은 음식을 다시 내가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한 입만'은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한 창 클 때를 지나고 있던 여중생, 여고생들은 뒤돌아서면 배가 고팠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매점으로 뛰어 내려가 빵, 과자, 떡볶이 등을 사 먹었고, 4교시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도시락을 까먹기도 했습니다. 물론, 급식이 시작되고 나서는 이런 문화도 없어졌지만요. 어릴 때부터 먹는 속도가 느렸던 저는 생존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한 입씩만' 먹겠다고 몰려든 친구들의 젓가락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국물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죠. 음식 솜씨 좋은 엄마가 정성스럽게 싸주신 반찬도 저는 아직 한 두 젓가락 밖에 못 먹었지만, 바닥이 보이곤 했습니다. HOT, 젝스키스가 한창 인기 있었던 때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나 내게 ‘한 입'은 꽤나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제가 요즘에 ‘한 입만'이라는 말을 꽤나 자주 합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제 모습을 ‘발견'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유는 제가 ‘한 입만'이라고 말하는 상대는 특정인 몇몇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남편에게 ‘한 입만'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때론 회사 동료에게도 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한 입만’이라는 말을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별다른 의미도 없습니다. 정말 한 입만 먹으면 되니까요. 무언가를 한 개를 다 먹기엔 벅차고, 그래도 맛도 보고 싶고, 정말 한 입이면 딱 만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말합니다. 


나 한 입만



이런 저를 남편은 절대 이해 못합니다.

“그냥 하나 더 먹어. 귀찮아서 그런 거라면 내가 하나 더 해줄게.”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정말 딱 한 입이면 됩니다만…


글을 쓰다 보니 별 도움도 안 되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굴러다니는 시시콜콜한 것, 나태주 시인이 말하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풀꽃과 같은 존재들을 들어 올려 그 위에 붙은 먼지를 홀홀 불어 털어내고 내 삶의 선반 한켠에 올려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한 입만’이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한 입만’에 대한 시시콜콜한 예찬론을 펼쳐보고자 합니다.


일단, ‘한 입만'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는 증명입니다.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이 먹는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고 한 입만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넓은 의미의 가족을 뜻하는 ‘식구(食口)'라는 단어 또한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는 의미가 있을 만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더불어 위생상의 문제나 음식을 나눠 먹으면 전염되는 A형 간염과 같은 위험 상황을 간과할 수 있을 만큼 상대방을 알고 있고, 신뢰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한 입만’은 한 입만 먹는 행위를 넘어선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내 것 한 입을 기꺼이 덜어줄 수 있는 넉넉함, 그리고 내 한 입을 덜어줄 때 상대방이 느끼게 될 한 입 이상의 채워짐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초코파이만 정이 아니라 ‘한 입만'도 정(情)입니다.


제게 있어 한 입만은 상대방에 대한 나름의 애교이자 애정 표현입니다. 

간지럽지만, “나 한 입, 너 한 입” 이런 거 말입니다. 체질적으로 애교는 직접 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보는 것도 힘들어합니다만 남편에게 ‘한 입만’이라고 하며 나름의 애교를 부려봅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만요.  


남편은 요즘 음식을 만들 때 딱 한 입 분량을 더 만듭니다.




'한 입만'이라는 말을 할 때 상대방은 대부분 핀잔을 줍니다. 특히 더욱 친근한 사이일수록 말이죠. 

그러나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한 입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나를 친근하게 생각는군요.

당신은 나를 신뢰하는군요.

당신은 나와 정을 나누고 싶어하는군요.

당신은 내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군요.

이렇게 생각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운동하러 가기 전에 드는 오만가지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