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nie Oct 28. 2022

IBDP 국어수업을 구상해보며 생각해보는 '진짜 공부'

    고등학교 때 성적이 가장 안 나와서 고민인 과목은 “국어”였다. 반에서 국어 과목을 잘하는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그 비결을 물어보면, “글쎄, 나는 중학교 때까지 책을 많이 읽어서 국어는 별로 어려움이 없어!”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문제집을 덮어 두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짤막한 몇 문단짜리 지문 하나 당 딸려 나오는 3~4개의 문제를 열심히 풀고 또 풀었다. 어떤 국어 선생님은 지문을 먼저 읽는 게 아니라 문제를 먼저 보고 지문으로 올라가 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지문을 읽지 않고 어떤 답이 지문 어디에 숨어 있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건지 잘 이해는 안 됐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꾀를 부려봐도 성적은 제자리였다.


    그러다 고3이 다 되어서 한 이상한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은 나의 고민을 단번에 정확히 파악하시더니 가장 먼저 내 손에서 문제집을 치우셨다. 그리고 “진짜 공부”에 대해 설명하시기 시작하셨다. 이런 문제풀이가 국어가 아니라, 이렇게 대화하는 삶이 국어이고 우리가 접하는 모든 텍스트는 이런 삶 자체라고 하셨다. 그리고 문제집을 치우신 대신 진짜 책들을 통으로 쥐어주셨다. 그리고 앞뒤 다 자른 희곡 지문 대신에 영화를 통으로 감상했다. 그리고 이해한 바, 생각하는 바를 편하게 나누었다. 나는 그때 수다가 아닌 대화가 무엇인지 처음 깨달았다. 이런 진짜 공부를 하니 단 몇 개월 만에 짤막짤막한 수능 지문은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수능 국어 공부를 하다가 처음으로 교내 독후감 대회에 나가서 금상을 받는 경험도 했다. 사실 그리 뛰어나지 않음에도 매우 운 좋게 나름 엘리트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교내에서 결코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기에 이 상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컸다. 공부한답시고 수능 문제 풀이만 계속했더라면 이런 대회는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진짜 국어 공부는 독후감 대회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조금 아쉽게도 내가 이 선생님을 만난 건 사교육 장면에서였는데, 나는 이 선생님의 철학과 교수법과 진심이 좋아서 친구들에게도 이 학원을 추천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수업을 한 번 들어보고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고3이 즐겁게 책 읽고 영화 보고 토론하고 하는 걸 받아들이는 학생과 학부모는 몇 없었다. 내가 그 선생님의 교육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는 이미 잘못된 방법으로는 안 해 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평소에도 이 교육 환경과 해야 하는 공부들이 좀 이상하다, 정상적이거나 상식적이지는 않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공부의 패러다임을 180도 바꾸었던 사건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경험으로 간직되고 있다. 


    IBDP에서의 모국어 교육과정은 나의 이때의 “참 공부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IBDP 모국어 교과의 목표는 언어와 문학을 감상하고 평생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으며, 평가는 학기별로 글쓰기 및 인터뷰,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교육과정은 교수요목만 간결하게 제시되어 있다. ‘교육과정의 대강화’가 잘 실현된 예이다. 총 4학기를 진행하는데 각 학기별로 주제는 교사가 재량껏 정하고, 각 학기별로 어떤 장르의 몇 개의 작품으로 구성해야 하는지만 나타나 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주제로 어떤 작품들을 선정하여 수업을 진행할 것인가? 나라면,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기는 하지만, “정신적인 삶” 및 “실존” 등을 주제로 하여 독일문학 중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혹은 <지와 사랑>,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 불문학인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같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현실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사는 것에 대해 철저히 내면으로 파고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개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처음 벗어났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으면서 이런 문학들에 깊이 공감하곤 했었는데 그때 이런 책을 읽으면서 한 생각들을 사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했다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런 고민과 경험을 학생들과 나눌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또한 “가상과 현실”을 주제로 하여 사이버 연애를 다루고 있는 소설인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와 꿈과 현실 우리나라 고전소설 <구운몽>, 그리고 가장 최근의 화두를 다루는 비문학 <메타버스 사피엔스 : 또 하나의 현실, 두 개의 삶, 디지털 대항해시대의 인류>와 같은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최신의 비문학과 고전 소설, 그리고 세계 문학을 하나의 주제로써 다루는 작업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좋았던 점은 나의 인생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장과정에서도 내가 어떤 교육적 작용을 받으며 어떤 원리로 학습을 하며 어떻게 성장해가고 있는가를 예리하게 탐색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약 내가 IB 국어 교사라면, 교육학을 공부한 경험을 살려 루소의 <에밀>이라든지 정범모 교수님의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든지 여러 교육과 관련된 소설과 에세이를 함께 읽으며 고등학생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교육자라면 스스로를, 혹은 후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조금만 해보니 IBDP에서 수업은 교사의 인생 전체가 투입되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만든 교육과정은 그 학교의 교감 교장 선생님도,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과정이야말로 진정한 교사교육과정일 것이다. 정말로 이러한 교육과정 구성과 수업이 가능하고 보장받을 때 교사의 전문성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지 않을까? 일각에는 교사가 전문직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곤 한데, 전문성이라는 것은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 오직 그 사람이어야 가능한 무언가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교육과정, 똑같은 교과서로 어떤 교사가 해도 거기서 거기인, 그렇기 때문에 사교육이 마구 침투할 수 있고,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는 수업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진짜를 아는 사람들은 진짜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진짜를 아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알려고 가짜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굳이 잘 알려주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야기해보아도 진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이기는 한다. 





P.s. 사실 아무 문학이나 다 선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IB에서 제공하는 리스트가 있다. 글쓰면서 활용하려다 활용하지는 않았지만 발견한 자료를 공유한다. 

https://ibpublishing.ibo.org/prl/?lang=en#


이전 02화 지속 가능한 교육, 찬반 아닌 선택과 운영의 문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