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도교수님은 학교교육과정으로 진로별 교육과정을 주창하신다. 결국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교양을 쌓는 일보다는 직업을 갖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지금 교육과정은 교양인이 되기 위해 이것저것을 다 알아야 한다며 진로는 보이지 않는 교과목을 늘어놓고 이수하게 하여 결국 진로로 이어지지도, 그렇다고 해서 교양인으로 길러지지도 않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찍부터 진로를 정해놓고 그것만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어릴 때 기회를 제한해버리는 잔인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나의 지도교수님은 '첫 직업'을 말씀하신다. 진로교육이란 학교교육을 마친 후 '첫 직업'을 갖게끔 하는 것인데, 첫 직업은 항상 잠정적이고, 복수일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신다. 진로교육을 통해 첫 직업을 갖게끔 하는 것은 일단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는 독립적인 인간을 기르는 일이지, 평생 그 일만을 하도록 학생의 인생을 제한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교통과 통신, 교육의 발달로 학생들이 진출할 수 있는 직업의 무대가 점차 넓어짐과 동시에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여 계속해서 있던 직업은 없어지고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고 있다.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직업도 계속해서 달라진다. 이에 비하여 학생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접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한정적이며, 교육과정을 통해 제공받는 진로 및 직업 탐구의 기회도 제한적이다. 학교는 뚜렷한 진로 및 직업의 목표 없이 산업화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교과 위주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고,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과 흥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기성세대가 권유하는 직업이나 미디어에 비치는 직업 중에서 희망 직업을 대강 선택한다. 그마저도 선택하지 못한 학생들은 불투명하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은 채로 학창 시절을 견딘다.
한편, 위생 수준의 향상과 의료 시스템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통계청(2020.10.06.)에 따르면 2100년의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92.5세이다. 그렇다면 2100년에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태어난 해는 2007년이므로, 2022년 기준으로 만 15세, 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다. 즉, 현재 우리나라 중학교 학생들은 2100년까지 총 92.5년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학교에서 미래를 준비해주는 기간은 고작 20세에서 25세 정도까지이다. 수명이 늘어나고 지식이 고도화된다고 해서 미래준비기간, 혹은 교육기간을 무작정 늘릴 수는 없을 것이고 그것은 개개인도 원치 않을 것이다. 대신, 그럴수록 더욱 사회에 빠르게 진출하여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학습해나갈 수 있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즉, 첫 직업에 종사하는 기간은 인생의 끝을 향해가는 기간이 아닌 제2의 인생, 인생의 후반기가 아닌 하반기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첫 직업은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어떤가 제안해본다.
학교교육이 모든 것을 책임져줄 수 없다. 그러나 학교를 마쳤다고 해서 배움을 마칠 필요는 없다. 학교를 마치면 사회에서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공부(혹은 취업 준비), 직장=일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학교를 마쳤는데 직장에 들어갈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면(혹은 원하는 직장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학교를 대체할 여러 대체제를 찾는다. 추가 공교육 기관에 들어가거나 학원을 다니고 인강을 듣고 교재를 사서 독학을 한다. 그러나 추가 준비 없이도 현재 수준에서 받아줄 직장도 많다. 물론 당장은 급여나 복지 등이 원하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첫 직장을 종착점으로 여기지 말고 또 다른 배움의 공간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돈을 쓰면서 배우지 말고 돈을 벌면서 배우는 곳인 것이다. 컴퓨터 활용 자격증 공부보다 옆 동료에게 배우는 엑셀 기술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번 돈 가지고 자격증 준비해서 따면 되는 것이다. 모의 기획서 백날 써보는 것보다 혼나가면서라도 직접 무언가 기획해보는 것이 낫다. 그리고 출장과 미팅을 다니며 여러 직업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람들이 나에게는 어떻게 비치는지, 내가 그 직업인이라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지, 나도 저 위치에 있어 보고 싶은지 등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학교에서 알 수 있는 직업군은 매우 한정적이다. 첫 직장이 내가 평생 있을 곳이고, 회사가 갑, 나는 을(물론 계약서에는 그렇게 쓰여있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속으로는 내가 갑이라고 생각하면서 첫 직장을 이용해서 밟고 올라갈 곳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진짜 현실에서 느껴지는 것,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느껴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생각을 정리하고 사회인으로서 자신을 발견해갈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자유로운 상태,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어서 취업하라고) 보채지 않는 상태에서 더욱 여유 있고 자유롭게 다음 인생을 설계해 나갈 수 있다.
나는 졸업 후 바로 첫 직장에 들어갔고, 나는 그 직장을 방패 삼아 나만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벌었다. 그 안에는 그 직장에서 최대한 오래 붙어 있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그곳 밖에서 내 갈 길을 정해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2년간 앞으로 갈 방향과 관련해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도 말해주지도 않았던 것들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우선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일할 수 있을 만한 교육 관련 기관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속한 기관도 있고, 이 기관과 유사한 기관도 매우 많다. 그런데 이런 곳들을 대학을 다니면서는 그 존재조차 몰랐고, 알았어도 그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교육학과 학생들의 진로는 크게 3갈래로 나뉜다. 임용고시를 봐서 교사가 되는 것, 전공과 크게 관련 없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기관들은 대학원에 가면 보이기는 한다. 석사 졸업 후 갈 수 있는 연구직 자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부를 졸업하고도 할 수 있는 포지션도 많이 있다. 학부 졸업 후 고시, 대기업, 대학원 이 3갈래 중 하나의 진로를 정한 학부생 중에는 다른 선택지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냥 주변에 보이는 것 중에서 하나를 정한 경우도 많이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학교에는 진로 정보가 너무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회에 일단 나가보면, 학생일 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진로의 길이 비로소 보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교육거버넌스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교육행정학이라든지 교육 정책론에서 배우지 못한 현실을 직접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뭐, 배웠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거나 실감 나는 지식이 아니었기에 내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첫 직장에서 교육부와 국회와 대학 교수 및 사회 지도층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넘나들며 각종 회의와 포럼을 다녀보며, 교육정책이 어떻게 발현되고 전달되고 실현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았다. 교수님들은 학교 밖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시는지, 국회의원들의 역할은 정확히 무엇인지, 교육부는 (언론에서 비치는 것과는 다소 다르게)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직접 보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 30대와 4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더 구체적으로 다시 계획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직업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너무 환상적이다. 꿈꾸던 직업을 실제로 갖게 되고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내가 생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사회로 나가 현실을 보고 다시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사회에서는 학교에서보다도 더 다양하고 많은 인생 선배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직장 동료와 상사들에게 적극적으로 나의 진로 설정을 위한 질문을 하곤 했다. 나의 이런 태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물론 그 안에서는 그곳에 오래 있고 싶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기는 하다. 이것도 또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얻은 팁이다. 아무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사적인 자리에서 살짝 해봐야 하지만, 그러다 보면 그중에서는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주고 나의 고민을 적극 지지해주고 유용한 정보를 주는 분들도 분명히 만날 수 있다. 나는 직장에서 만난 동료이자 상사였던 박사님을 통해 지금 다니는 대학원에 오게 되었다. 일을 시작한 나는 대학원에 가더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일을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려면 야간대학원인 특수대학원을 다녀야 하고, 전일제 일반대학원을 다니려면 일을 그만두고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게 맞다. 내가 일을 계속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대부분 특수대학원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 박사님이 “선생님은 일반대학원에 가세요.”라고 말해주었고 일반대학원이면서도 대부분이 일을 하는 분위기인 지금의 대학원을 알려주셨다. 지금 다니는 대학원은 학부 때는 생각도 하지 못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자대 아니면 서울대, 드물게 유학의 사례와 정보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학부 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이 사회에서는 보인다. 나는 사회에서 만난 선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중에서 내 마음에 꼭 맞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선택하기까지 2년이나 걸렸지만 내가 꼭 상상했던, 우리나라의 교육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대부분이 현장에 있으면서 그 현장 경험을 통해 생생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실사구시의 전당을 비로소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한 분의 조력자를 만난 것만으로도 첫 직장에서 보낸 시간이 인생에서 충분히 의미 있게 생각된다.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공부 내용 자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회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큰 외적 동기도 제공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명확하게 알고서 공부를 계속하게 됐기 때문이다. 막상 대학원에 들어가도 도대체 내가 석사를 왜 하는 거지, 박사는 왜 하는 거지, 이 고생을 한다고 내 인생이 뭐가 달라지나, 하는 고민에 빠지거나 대학원에서도 여전히 뚜렷한 진로가 보이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다. 나는 사회에서 학사학위자가, 석사학위자가, 박사학위자가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직접 보고, 나의 분야에서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후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적어도 석박사가 이미 넘쳐나는 시대에, 대학원에 간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때이지만 적어도 내가 이 고생을 왜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첫 직업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어준다. 어떤 일을 새로 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자기소개서를 쓰려면 나는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성향의 사람이며 집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막 학교에서 나왔을 때는 쓸 말이 많지 않은 게 당연하다. 첫 직장은 내가 가장 원하는 곳이 아니었을지언정 더 나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풍부한 스토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정리하면, 학교교육과정은 학교를 마치면서 바로 직업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진로 교육과정이어야 한다. 학교를 마치고 가장 처음으로 갖게 되는 첫 직업은 평생을 바칠 직업이 아닐 수도 있고 100%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첫 직업은 안주할 곳이 아니라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학습을 지속하는 장이다. 사회에서는 학교에서보다 더욱 생생하고 실질적인 지식과 태도를 학습할 수 있다. 지식 고도화 사회, 100세 수명의 시대로 하나의 직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직업의 판도도 계속해서 바뀌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생각해본 첫 직업에 대한 의미이다.
통계청(2020.10.06.). 기대수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