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전공수업의 토론에서 으레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우리는 현재 한국의 진학계 고등학교에서 진로에 적합하지 않은 교과를 배워야 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든 고교 내신이든 상태평가로 측정되기 때문에, 원하는 진로에 적합한 과목보다는 인기있는 과목,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만만하게 많이 선택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보다 쉽게 1등급을 취득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학생들과 교수자가 현 고교 교사들의 비교육성을 비난하면, 꼭 한 학생은 손을 번쩍 들고 이는 고교 교사들의 잘못이 아니라 대학 입시의 잘못임을 지적한다. 대학에 직접 문의를 해보아도 경제학과에 진학할 학생이 사회탐구 과목 중 한 과목을 선택할 때 비인기 과목인 ‘경제’를 선택해서 5등급을 받는 것보다 많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사회문화’를 선택해서 1등급을 받는 학생을 대학의 경제학과 선발에서도 선호한다고 답변하기에 고교 교사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등 교육과정의 개혁은 대학입시의 개혁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이 손을 잡고 같은 방향을 보며 개혁을 하고 연구를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8년 연구>가 현재까지 흥미를 끄는 것은 고교와 대학이 협력하여 진행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첫 문단에서 제기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진로별 교육과정에 있어서 교과의 중요성에 대한 의문점을 갖게 했다. 학교는 학생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한다는 데 동의하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하여 직업을 갖는 것이 중시되지 않는 경우에도, 분명한 직업적 관심을 가지고 대학에 갈 때 이후에 진로 선택을 바꾼다 하더라도 대학에서 보다 유익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학과를 진학하고 특정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해서 특정 교과를 배워야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학은 특정 교과를 잘 하는 학생이 아닌 빠르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학생, 말과 글로 합리적이고 유창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학생, 좋은 습관과 열정으로 지적인 문제를 다루고, 이를 끝까지 수행하는 법을 아는 학생을 원했고 교과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학생이 이러한 근본적인 자질과 태도를 갖추었다면, 이를 어떻게 획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결국 특정 과목에 적응한 후(몇 주 후)에는 해당 과목을 미리 배우고 온 학생과 처음 배우기 시작한 학생에게 별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대학이 경제학과 학생을 선발할 때 경제 5등급보다 사회문화 1등급을 왜 선호하는지에 대해 수긍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교 교사들과 대학의 선발자들은 항상 함께 가며 토의하고 서로 이해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8년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8년 연구의 참여자들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삶의 방식을 이해시키고 바르게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학교에서 민주주의의 삶의 방식을 매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에 동의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흔들리고 있는 중인 거 같다. 8년 연구에서 개혁된 중등교육의 내용을 보면 상당 부분 우리나라의 교과에서 다루는 내용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교과서에도 학생들의 삶과 교과의 내용을 연관시키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 어떤 부분은 개혁이 된 것 같은데도 어떤 부분은 그렇지 못하여 결국 전체가 그렇지 못한 듯한 원인은 전체의 철학, 우리만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8년 연구>의 참여자들도 교육의 근본 원리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한 탐색을 하던 모임에서 “교육의 핵심 목표를 결정하는 작업은 흥미롭지만 더이상 철학을 논의하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말고 실제적인 교육과정 개정 작업에 착수하자.”라고 문제를 제기한 참여자들이 있었지만 결국 몇년이 지난 후 모든 사람들이 전국 중등학교 교육과정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타당한 철학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우리가 <8년 연구>를 수행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Aikin, Wilford Merton. (2002). (중등학교 교육과정 개선을 위한) 8년 연구 이야기. 서울: 교육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