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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Dec 21. 2023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에 대한 결정권은 누구에게.

어린이집 영어발표회에서 뽀로통한 아이의 모습.

어제는 둘째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하는 영어발표회에 다녀왔다. 예정엔 없었지만, 울릉도에 일하러 갔으나 돌아오는 배가 없어서 열흘간 '갇혀'있던 남편이 극적으로 탈출을 하고 반나절을 달려 집에 오게 되면서 남편도 함께 참석할 수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행사의 참여는 기대도 되는 한편, 아이에게 뭔가 부담스러운 것을 시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여태까지 몇 번 참여한 경험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아이들이 줄지어 기다렸다가 화려한 사진을 남기기위한 '쇼'같은 행사가 대부분이었고, 그런 행사의 중심에는 아이들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어른들이 초대되면, 자연스레 심은 대된 어른들로 바뀐다. 아이들이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가에 대해 서로의 룰을 만들어서 전체적인 방향이 설정되는 것이다.


난 어린시절부터 이러한 경험을 수없이 해왔다. 시골에서 자라왔고 우리 아버지는 맏이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모셨기에, 가족의 중요한 연례행사는 늘 우리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수십명의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게되면 아이들은 늘 뒷전이었다. 한방에 몰아넣고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 - 제사-에 혹은 어른들, 정확히는 남자어른들에게 시중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방치되었고, 재밌는 일도 많았지만, 서로 격해져서 나이가 어린 축의 나같은 아이들이 훨씬 덩치가 큰 사촌에게 얻어맞는 일도 생긴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배불리 먹여지긴 했겠지만, 행사의 어디에도 우리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난 어린이집에 초대되면서, 결코 초대된 어른들을 위할 필요가 없는 그 자리에 순수하게 아이들을만을 위한 행사가 마련되는 것이 왜그리 어려운지 늘 의문이었다. 우리사회는 너무도 뿌리깊게, 자신보다 중요한 다른 누군가를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여튼 그런 비판적인 마음을 갖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의상을 입힌다는 것에서 좀 걱정이 되었는데, 역시나 아이들은 부담스럽게도 화려하고 불편해보이는 의상을 입고 있었다. 자의로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아들램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얼굴에서 도저히 어색함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발표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할리 만무했다. 일어서서 부모들 앞에서 율동을 하고 노래를 해야하는 와중에 그는 멀뚱이 서서 노래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다만 중간중간 "똥꼬야"같은 엉뚱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말로는 아이가 옷을 입기 싫어해서 맨 마지막에 억지로 입혔다고 한다. 아이는 옷을 보고 불편해보였을수도 있고, 어쩌면 행사에서 자신은 귀엽게 보여지는 역할을 수행해야만한다는 그 본질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거부감이 들었을 수 있다. 여태까지의 행사가 그래왔듯이 말이다.


부모나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평소에 입기 힘든 화려한 옷을 입혀서 그 찰나의 귀여움을 영원히 사진으로 남긴다면, 아이들의 잠깐의 불편함은 좀 감수하게 할만 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 존재라고 아이들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인생에서 내가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대한 판단의 주인은 자신이어야지, 왜 나를 보는 시선, 나를 찍는 카메라여야 하는가?


행사가 끝나고 나와 남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아이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상황에 맞지않는 엉뚱한 말을 내뱉는 것에 대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좀 뒤쳐진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아이는, 무슨 이유이건간에, '나는 이 행사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현을 한 것일테고, 그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내가 판단하기에도 좀 지나친 점이 있어보이는 그 행사를 아이가 싫어한다고 해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은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원래 그런거라면서, 자신은 이제까지 시키는 것은 모두 잘 참여했고, 우리 사회에서 적응하려면 우리 아이들도 그래야한다는 뜻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부분에 대해서 나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야함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늘 자신의 반대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아이가 한국사회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는 학교를 다니고, 사회속에서 성장하면서 사회가 바라는 사람으로 성장해갈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하는지 본능적으로 알테니까 말이다. 그것이 반드시 규형잡힌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난 앞으로도 이 고민과 함께 살아가야할 것임을 안다. 이러한 교육의 문제 때문에 종종 다른나라로의 이민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형편상 가능한 일 같아 보이진 않는다. 여튼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다. 최소한 네가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 그 거부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적어도 나처럼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라게 되진 않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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