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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02. 2024

아이들은 내 편이다.

내가 엄마가 된 이유.

드디어 열흘간의 가정보육이 끝났다. 내가 내 아이들을 돌보는게 지치고 힘들 일인가 싶지만 사실 그렇다. 내게 제일 부담되는 요일이 금요일이고, 월요일이 제일 기다려진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해서 집에서 돌보게되면, 그리고 그 날들이 길어지면 점점 지친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돌봄에 있어서 나는 참으로 혼자다. 남편은 지방에서 휴일도 없이 일하는 적이 많아 집에는 한달에 두어번 오고, 홀 시어머니도 부모님도 자주 왕래하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여력이 안되신다. 지난해 이사를 한뒤로 친정부모님은 거리상 좀 가까워지기는 했으나, 두 분 다 일을 다니시고, 우리집에 찾아오시거나 친정에 가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하지 않으시다. 필요한 것을 해주는 데에는 두팔 걷어붙이고 나서시는데, 같이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을 지켜보고 즐거운 것을 나누고 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나의 어린시절을 돌이켜보아도 부모님은 필요한 것을 해주는 존재였다. 부모님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거나 가족이 같이 재밌게 시간을 보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많은 시간을 옛집에서 할머니와 보냈고 아빠는 기억에 거의 없으며 나이가 거의 제일 어린 며느리였던 엄마는 나보다는 다른 일로 바빴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다.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나의 어린시절은 딱히 엄청 힘들진 않았지만, 되뇌이면 기분 좋을 따뜻하고 재밌는 기억이 없다. 익숙한 것은 홀로 남겨짐과 외로움이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나는 성인이 되어 인간관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전에도 그런 문제가 있어왔지만, 성인이 된 후 문제가 두드러졌다.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는듯해도 늘 불편하고, 같이 있으면 다시 혼자 있고 싶어졌다. 마음을 둘 곳을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는 아주 가까운 친밀감을 원했는데, 바로 이성이었다. 대학교 2학년 무렵 처음 연애를 하게되었다. 인터넷으로 같이 사진이라는 취미로 알게된 사람이었다. 원거리라 몇 번 만나고 관계가 지속되지 못했다. 문자로 이별을 통보받고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리가 빙빙돌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당시의 느낌은 몇 년 전에 있었던 동생의 죽음보다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리는 것 같았다. 헤어짐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그이는 그뒤로 연락을 받지 않았고, 그렇게 그 일은 내게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채로 나를 수년간 괴롭혔다. 괴로운 마음을 술에 의지했다. 연일 이런저런 핑계로 술자리가 만들어지는 대학생때이기에 술과 가까워지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매일 기억이 끊기도록 술을 마시고, 사람들에게 실수도 많이하고, 마셔도 마셔도 해소되지 않는 괴로움에 다시 술을 마시고 했던 것 같다. 당시 뻥 뚫린 가슴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해결 방법을 알지 못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만,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첫 실연 이후, 그 뒤에 이어지는 연애도 나를 그리 행복하게 만들어주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친구와의 관계도 그랬지만, 남자친구도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했다. 아주 가까운 친밀함을 원하면서 쉼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내가 연애를 하고자 했던 것은 채워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채우려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의 연애는 그렇게 불안정하고 오래 지속되지 못한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이성문제는 다른 문제로도 이어졌다. 직장생활에서 충분히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연애문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일도 생겼다. 어딜가나 남자와 가까워져서 일을 그르치게 될까 두려웠다. 1년을 준비해서 갔던 독일유학도,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귀고 얼마 뒤 헤어지면서,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했다. 그때의 기분은 나는 참 최악이구나 싶었다. 삶의 목표도, 원대한 꿈도 없이 사사한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고 금방 그만 두어버리는 나는. 더이상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나 싶던 때였다. 



그렇게 외로움이 힘들어하던 내가 결혼해서 엄마가 된 것은 참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최악인 것 같고,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 선택한 것이 결혼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나를 받아줄 남자를 참으로 열심히 찾아다녔다. 결국 외모와 좋은 머리에 반해 결혼하긴 했지만, 결혼이후 내 정신상태는 안정되었다. 돌보아야할 아이 때문에 그렇게 되긴 했을 것이다. 한창 젊고 나를 바라봐주는 남자가 많을 것 같을 때는 엄마가 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처럼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은 도저히 혼자이고 싶지 않은 순간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렇게 벼랑 끝에서 선택한 것이 엄마가 되는 것이다. 내곁을 떠나지 않을 유일한 존재, 아이들의 엄마가 되는 것.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없이 아이들과 부대끼다보면, 마음이 방황할 틈이 없다. 첫째 아이를 낳고는 종종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혼자 잘 노는 아이었고, 아이하나 돌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를 낳고 그 공백이 좀 더 채워졌다. 둘은 커가면서 서로의 시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좀 더 어릴 때는 많이 힘들었다. 어린이집에 보내기도 전이라, 도와주는 남편도 가족도 없이, 24시간 두 아이들과 지지고 볶을 때면, 이러다 미치겠다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말이 통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게 많아지고, 어린이집에 가고 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난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은 유일한 내편이라는 것을 말이다. 홀로 남겨진 내곁을 늘 지켜주는 게 아이들이다. 입덧으로 힘들어할 때 내 배를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이들이고, 하루에도 수없이 내게 사랑한다고 하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 아이들이다. 내가 아이들에게는 주는 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난 많은 아이들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준다고 해도, 그 육아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홀로 육아를 할때 느껴지는 것도 역시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의 소통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아이들은 내게 끝없는 사랑을 바라고, 나는 어떻게 사랑을 주어야하는지 막막할때가 많다. 같이 즐겁게 아이를 키우는 경험을 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느낄때 절망은 아니지만, 좀 쓸쓸하다. 그래도 하루하루 커가는 내 편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들이 성인이되고 내게 뭔가 대단한 것을 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나의 아이들일 것이라는 점이 내게 위안을 준다. 내 뱃속에서 키워서, 낳아서, 사랑으로 기른 아이들.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그래도 오늘부터는 다시 어린이집에 가니까.. 아무리 사랑해도 조금 떨어져있어야 애틋함도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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