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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12. 2024

그것은 좀 더 사랑해달라는 표현.

부족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완벽한 사랑.

어제는 첫째 아이에게 화가 많이 났다. 화를 내면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분노를 참기가 어렵다. 화가 가라앉고, 잠든 아이들을 보며, 내가 참으로 너무나 다른 두 아이들을 기르고 있다는 걸 느낀다.


딸인 첫째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다.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주 아기때부터 상호 교감에서보다 혼자 즐거움을 찾는 것을 즐겼다. 혼자 잘 놀고, 내 품을 많이 찾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나를 보며 웃을때까지는 태어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귀엽고, 자신이 모든 일을 잘 해내고, 자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을 원한다. 음악을 들으며 꺼진 티비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어 춤을 추는 것을 볼 때면, 내 뱃속에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나 놀란다. 나는 그녀의 그런, 내게는 없는 당담함, 자아도취에 매혹된다. 그리고 아이의 저런 본연의 모습을 내 곁에 있는 날까지 지켜주어야지, 하는 마음에 책임감을 느낀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져서 태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첫째 아이를 보면, 그 자신만의 '완결성', '완벽함'이 느껴진다. 영리한 아이는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반면 엄마로서의 나는 그렇게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겁이 나는 것 같다.


출생 직후부터 이 아이에게 가장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은 '잠'이었다. 신생아 때 이 아이가 자야할 바로 '그 때'를 놓쳐버리면 몇시간이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울음은 나를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그 시간을 맞추어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를 재우고 나면, 밤새도록 깨지않고 잠에 빠져든 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뒤로도 잠은 첫째 아이에게 중요했다. 한번 잠이 들면 깨지 않고 푹 자는 만큼, 자야할 때를 놓치면 짜증을 내고 날카로워진다. 낮잠을 자는 시기까지는 그래도 평화롭게 저녁시간이 흘러갔는데, 작년에 어린이집에서의 낮잠이 없어진 뒤로, 피곤이 쌓인 저녁시간은 그 아이에게 가장 예민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최근엔 이유없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물고늘어지는 일이 많다.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계속되는 짜증에, 나는 피곤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 말려들 때가 많다. 어릴때 시도때도 없는 부모의 큰 언성, 다툼 속에서 자란 나는, 나를 질타하는 듯한 고음은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중의 하나이다. 귀를 틀어막고, 제발 저 소리가 멈추기를 바랄고플 때가 많다. 제발 그만해달라는 나의 발악은, 첫째아이에게는 자신에 대한 거부, 질타로 들릴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잘 품어주는 법을 모르고, 그것은 날카로운 우리 두 사람을 더욱더 날카롭게 만드는듯 하다.



반면 남자아이인 둘째는 본인 자체보다 사람과의 상호교감이 중요한 아이다. 신생아때부터 눈을 마주칠 때마다 까르르 웃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기와의 경험은 첫째아이가 전부였던 나는 아기는 웃을 줄 알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과 교감하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 아이는, 늘 나의 품을 찾는다. 아기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잘못을 해서 혼이 나면, 혼이 나고 있는 사실보다, 우리의 관계까 불편해진 것에 힘들어한다. 그래서 누나가 혼나거나, 내가 첫째아이로인해 힘들어할때면, 누나와 엄마인 나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누그러뜨리고자 노력을 한다. 누나를 위로하고 내게와서 사랑을 확인시켜준다. 나는 갓 다섯살이된 이 아이의 이런 행동에 늘 놀란다. 그리고 두 아이가 참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란다. 아이가 저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을 둘러싼 사람 사아의 갈등을 신경쓰고 괴로워한다는 사살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첫째아이의 계속되는 짜증으로 나의 분노는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이 나를 그리 분노하게 만들었나 생각해보면, 나에 대한 비난이다. 나는 인정을 가장 원하는 사람이기에, 그에 반대인 비난을 받는다면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에게 부당한 비난의 화살이 올때 나의 분노가 촉발되는 것 같다. 아이가 졸려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상황을 잘 넘기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쏘아붙이는 아이를 최대한 따뜻하게 품어주어야만 그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텐데, 화가 잔뜩 난 내가 나를 통제하고 아이를 품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한참 쏟아내고 난 뒤에도 어떤 것도 해소되지 않고, 마음 속에 더 큰 응어리가 자리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절망에 빠진다. 나 이외의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그 상황에 누구라도 탓하고 싶어진다. 부족한 나로 키워준 부모를 탓하고 싶고, 홀로 아이들과 감정의 시궁창을 뒹굴게하는 남편을 탓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아이가,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꿰뚫어 볼 것이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엄마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질타를 할 것이. 내가 그들을 낳았다는 그 자명한 사실로 나는 엄마가 되지만, 사실 내가 엄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 뿐이다.  어디에도 내가 엄마됨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그동안 엄마노릇을 제대로 해왔는지, 앞으로 잘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두렵다. 현재 나의 유일한 존재의 의미인 이 '엄마'라는 역할을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렵다.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기에, 겉으로는 좋은 엄마의 탈을 쓰고 싶을 것이고, 아이들이 진실의 심판자가 되려고 할때면, 나는 그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를 그렇게 화 나게 했던 첫째 아이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어뜻보면 이기적으로도 보이는 그 아이가, 사실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어쩌면 '나의 사랑'이라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내 품을 파고들지는 않지만, 어쩌면 파고들 줄은 모르지만, 그 아이는 누구보다 나의 사랑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작은 아이처럼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해맑은 웃음으로 안아달라고,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운 아이 떡하나 더 준다고, 요구하고 원하는 아이에게 더 사랑을 주게 마련인 것 같다. 나 또한 사람에게 파고드는 법을 몰랐기에, 부모의 따뜻한 품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결핍이 그 이후의 내 시기를 짓누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는 아이를 보며 좀 더 많은 사랑을 주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을 수록, 내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로 아이가 훌쩍 커버리면 어쩌나 겁이 난다. 내게 짜증을 내지 않고, 안아달라고 말한다면 좋을텐데, 그럼 내가 좀 더 빨리 눈치를 챌 텐데. 하지만 이런 것은 7살짜리 아이에게 요구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엄마로서 성숙한 어른이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나를 짓누른다. 성숙하지 못한 내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길러낼 것이 두렵다. 어디서부터 나는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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