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라고 씨발 정신과 함께.
나는 오랫동안 자신감이 부족했다. 스스로가 자격 미달이라고 느꼈고, 그 거대한 결여를 상상하면 심장이 조여왔다. 굽은 등을 펴기 위해 대학의 힘을 빌리려고 애를 썼던 적이 많다. 이 말은 참으로 오래 공부를 했고,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는 뜻이다.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학에 갔다. 쥐고 있던 적은 돈들은 어김없이 6개월마다 대학으로 흘러들어갔다. 몇 학기를 사고 나면 학위가 나왔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나는 늘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또 다른 고등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학교 근처를 전전했다. 이 끝없는 굴레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 있을수록 오히려 학교를 떠나기가 더 힘들어졌다. 보고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쌓여, 어느덧 나를 옭아매는 족쇄로 변해버렸다.
“네 글은 너무 예뻐.”
학부생 때 모교에 전 세계적으로 이름난 영화감독이 전임 교수로 있었다. 그가 맡은 영화 제작 워크샵 수업에서는 1:1 면담 시간이 필수였다. 내가 제출한 시나리오 원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그는 내 글이 너무 예쁘다고 말했다. 종이의 왼쪽 상단이 삼각형으로 접힌 것을 보니, 정말 읽은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잠깐 기뻤다. 칭찬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나온 그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너무 예뻐서 건드릴 수가 없어. 포장지를 벗겨야지.”
포장지? 내가 선물이라도 했던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물음표를 애써 삼키고, 멋쩍게 웃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답게 그의 혜안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나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그의 발언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다.
그날 모든 학생들과의 면담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강의실에 모였다. 교수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오셨다. 그리고 정말 맥락도 없이,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로 외쳤다.
“어쩌라고 씨발!!!”
순간 강의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다들 눈이 둥그래지더니 어느새 뒤집힐 것 같았다. 나 역시 과장 한 스푼 더 보태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교수님이 그렇게 기함하며 소리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씨발’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날아들었다. 그런데도 교수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냥 이렇게 살아. 어쩌라고 씨발. 남들이 네 작품에 대해 뭐라고 하든, 너에 대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 날것 그대로 살아야 해.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단순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교수님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고민할 것도 별로 없고. 내가 몸을 누일 작은 방 하나만 있으면 충분해.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방을 깨끗이 닦고, 책상에 앉아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밥 먹고, 그렇게 같이 자고 일어나서 다시 방을 닦으면 되는 거야. 그거면 충분해. 너희는 아직도 어리기 때문에 35살까지는 계속 시도해야만 한다. 중요한 건 씨발것을 계속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거고. 적어도 10년 동안은, 졸업하고 나서 10년간은 네가 진짜 즐거워하는 일을 찾아서 그걸 지속해야만 한다. 꾸밈없이. 날것 그대로.”
그제야 교수님과의 면담 시간에 언급된 포장지의 의미가 선명해졌다. 잘 보이려고, 글을 잘 쓴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그리고 과제를 제대로 해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 나 자신도 모르게 내 글을 포장하고 있었다. 온갖 욕망이 눈 가리고 아웅하며 포장지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그다지 옳지 않다는 판단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전문성’을 쌓으려 들어간 대학에서 ‘창의성’을 거세당하고 있다는 것을 교수님이 나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 같다. 그때 그는 아마 교수의 눈이 아닌, 감독의 시선으로 졸업반의 우리들을 마주했던 게 아닐까. 고맙게도.
개성이 쌓이면 그게 전문성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 감독님의 영화를 여전히도 종종 찾아본다.
안하무인과 ‘어쩌라고 씨발’ 정신 사이의 중간지점을 찾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나는 남다르고 잘났고, 너는 모른다’ 같은 오만한 태도를 피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부족함이 늘 언제나 절대적인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 게다가 완벽이라는 기준 자체가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완벽이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인맥, 권위가 굳게 쌓인 체제 앞에서는 따돌림당하지 않으려고 가끔씩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나는 어쩌라고 씨발 정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것. 남이 부여하는 자격에 기대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내 자격을 믿어주는 것. 종이에 적힌, 남이 발행한 전문성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내 발로 전문성을 쌓는 것. “쟤 뭐야?” 라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더라도 나는 귀를 막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며 어쩌라고 씨발을 외치는 것. 불안감에 가슴이 헐떡일 때면 주변에 도움을 구하고 비슷한 처지일지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 이 모든 것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
그렇게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학교 밖으로 나와 시도하고,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는 마음을 들쳐메고 집으로 돌아가고. 이 회사를 다니다 저 회사로 옮기고, 이 나라에 살다가 저 나라에 가서 정착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신탁처럼 내려졌던 그 나이에 가까워졌다. 35세. (그래도 아직 몇 년 남았다. 흠흠.)
자격과 전문성은 아마도 오래도록, 내가 남의 돈을 받고 일을 하는 한 계속 나를 따라다닐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그 고민이 고통으로 변할 때면, 여전히도 가끔 남의 명성에 기대고 싶은 약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내 밖에 있는 학교, 회사, ‘선생님’, 혹은 전문가 등이 나보다 더 커 보이고, 마치 그들에게 기대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35세가 아직 되지 않아 10년의 수련 시간은 채우지 못했으나, 대략 그 정도의 시간을, 충격적인 ‘어쩌라고 씨발’ 신탁 사건을 겪고 난 내가 항상 그 마음을 판단의 중심에 두고 나와의 대결을 펼쳐온 결과, 고통을 가라앉히는 최고의 방법은 내가 나의 스승이 되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주변에 기댈 무엇도 없어야 한다. 내 밖에 무언가가 있어 보인다는 환상과 착각도 깨야 한다. 의존성이 커지면서 자립성이 줄어든다 싶어질 때 과감히 떠나야 한다. 발목을 잡는 생각과 규칙이 작동하는 단체 속에 있다면 다리를 잘라서라도 버려내야 한다. 육신을 뺏기는 게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여기까지, 이런 생각을 품고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에게 반대하는 이들이 없을 리 없다. “그거 할 수 있겠어? 가능하기는 해?” “네가 그럴 자격이 있나?”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 아니야?” “실패하고 나면 어쩔 건데?”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의문과 질문들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여전히 같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지금까지 늘 같다. “안 될 게 뭐야?”
앞으로도 이 말을 외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 어쩌라고 씨발 정신을 장착하고 나면, 제아무리 심리적 장벽을 세우려 해도 나는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니 안 될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