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간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뇌로 생각한다면.
오래된 질문이 있다.
'이런 걸 왜 배워요?'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번 쯤 가져보았을 의문. 그리고 늘 같았던 대답.
'시험에 나오니까'.
시험에 나오는 지식은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다. 시험의 결과인 성적은 학생을 대학에 배치하는 주된 척도다. 대학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개인을 평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지표이며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기회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래서 '시험에 나온다'는 말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에 힘을 싣는 동시에 학생들이 배움에 대해서 갖는 의문을 가로막는 마법의 말이기도 했다.
부작용은 컸다. 이 기준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면 '시험에 나오지 않는'지식은 모조리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체육이나 음악처럼 시험을 치르지 않는 일부 과목에 관한 지식은 쓸모 없는 것들로 취급되기 쉬웠다. 심지어 성적에 큰 관련이 있는 과목의 경우에도 선생님이 시험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 학생들은 즉시 그 페이지에 X자를 그려 버리곤 했다. X자를 시원하게 긋는 아이들의 감정은 바로 해방감, 그 자체였다. 시험에 나오는 지식을 찾아 공부하는 일은, 학생들에게 하나의 굴레 였던 것이다. 시험은 공부의 이유인 동시에,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런 걸 왜 배워요?'
이 질문이 반복되고 학교가 같은 대답을 내놓고 있던 사이에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뛰어난 검색엔진과 인터넷에 보관된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지식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 편리한 형태로 가공까지 해 주는 생성형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질문이 바뀌었다.
'GPT에게 물어보면 되는데, 왜 배워야 해요? 그것도 고생스럽게.'
이 질문을 던지는 데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학업의 고통을 늘상 감내하는 학생들이야 항상 이런 의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비판적인 미래학자, 사회학자를 비롯한 다양한 방면의 지식인들이 학교에서 다루는 지식들을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질문은 근원적인데다가 강한 확신에 차 있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과거와 같은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무의미하며, 이는 오히려 학생들의 잠재력을 해친다. 앞으로는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활동이 중요하다. 또한 디지털 네이티브인 학생들에게 친숙한 학습의 방법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에듀테크'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비판은 상당부분 타당하지만 중요한 맹점이 있다. 현장에 눈을 돌려 학생들과 상담에 나서면 늘상 이런 대화가 오간다. 고등학교에서는 익숙하면서도 현실적인 대화의 장면이다.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니?'.
'컴퓨터 공학이요'
'그럼 수학이 필요하겠구나. 미적분은 물론이고 기하와 벡터를 꼭 선택해라.'
'관심있는 분야가 있니?'
'항공운항과에 가고 싶어요'
'영어나 제2외국어가 필요하겠구나. 제2외국어 중에 어떤걸 선택할지 잘 생각해봐라.'
'어떤 일을 하고 싶니?'
'국제통상학과에 가서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요'
'영어와 외국어, 세계사, 세계지리에 관심이 있어야겠구나.'
최소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희망하는 대부부분의 진로나 학과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 어떤 것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된다. 특히 4년제 대학에 설치된 대부분의 학과들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들 중 어딘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관련된 지식이 필수적이다. 면접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반드시 체크하는 영역이다. 학교의 지식이 일견 '주입식'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학생들의 진학과 관련이 되면 직관적인 '실용성'을 갖는 것이다.
또다른 의문을 들여다 보자.
'인공지능이 지식을 알려 주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런 걸 배워야 하나요?'
이것은 학생들보다는 교육 비평가나 학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TV와 유튜브에서 미래나 교육에 대해 다룰 때면 이런 류의 질문들이 단골 손님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접한 학생들이 비슷한 의문을 갖는다. '힘들게 배워봐야 쓸모도 없고, 곧 잊혀질 이 지식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죠?' 학생들이 의문을 가지고 고민을 나누는 것을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학교 지식은 너희들의 시대에는 의미가 없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옳지도 않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변화'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의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누가 뭐라 해도 오늘날 시대 변화의 핵심은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시대를 이끄는 사람들은 누굴까?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엔지니어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을 꼽으라면 무엇이라 할까? 단연 수학과 물리학이다. 엔지니어들은 이 두 학문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들이 코딩할 수 있는 수준에 큰 차이가 난다고 입모아 증언한다.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한 축은 생명과학(바이오)분야다. 학생들 중에서도 이 분야와 관련된 진로를 꿈꾸는 경우가 많다. 생명과학 분야에 진출하려면 어떤 걸 공부해야 할까? 당연히 생물과 수학, 그리고 윤리 같은 과목들이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윤리적인 논쟁들(예를 들면 인공지능에게 어떤 사회적 역할까지 맡길 것인지? 인공지능에게 재산권을 줄 것인지 등등)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하려면? 국어와 윤리, 역사 등 여러 인문학 교과에 대한 소양이 필요하다.
독서량이 풍부하고 수업시간에 배운 지식이 잘 정리된 학생들은 미래사회를 소재로 한 토론 활동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감정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세워 두었던 다양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적용해서 인공지능 시대의 여러 쟁점들에 관한 주장을 풀어 낼 줄 안다. 그 바탕에는 교과 시간에 배우는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산업 혁명과 2차 세계대전같은 - 그 고리타분한 지식들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창의성을 강조한다. 이 문제 역시 자세히 들여다 보면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먼저, '창의성'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창의성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관점을 뒤집거나, 관계 없던 어떤 요소들을 새롭게 연관시켜 바라보는 능력을 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많은 배경지식을 갖춘 학생들이 더 많은 관점과 지식의 연결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독서가 발군의 역할을 발휘한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책,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책,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책.. 이런 책들을 폭넓게 읽은 학생들. 이러한 학생들이 그 청소년 특유의 선입견 없는 유연한 사고를 할 때, 창의력을 빛을 발한다. 미래사회에 필요하다고 알려진 많은 지적 능력들은 교과 시간에 배운 여러 지식들과 그것을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도 많은 부분 얻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리학 지식을 활용해서 멀리 날아가는 종이 비행기를 만들어 내는 학생. 얼마의 각도로 물을 따라야 가장 조금 물을 흘릴 수 있을까를 실험 결과로 도출해 보는 학생. 땅에 떨어진 음식을 몇 초 안에 주워야 세균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지를 계산해보는 학생 등. 문제의 인식부터 색다른 학생들이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는 하나같이 풍부한 배경지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 지식의 많은 부분을 학교의 교과 수업이 채우고 있음을 무시해선 안된다.
한편, '시험에 나오니까'라는 대답도 여전히, 아니, 갈수록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 논리는 대부분 학교를 약육강식의 공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과 이 주장에 동의하는 부모님, 학생들, 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학교를 철저히 경쟁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각 교과는 경기 종목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이러한 생각은 몇가지 부작용을 낳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나친 선행학습이다. 이 아이디어에 따르면 학교는 결국 달리기 시합을 하는 곳이며, 먼저 출발할 수록 게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빠른 출발의 방법으로 부모님들은 '최대한의 선행학습'을 선택하고, 자녀들을 각종 학원으로 데려간다. '7세고시', '초등 의대 입시반'같은 경우는 이러한 매커니즘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선행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남과의 비교에 있다는 점이다. '몇 살의 나이에는 언어능력이 어느정도면 돼'가 아니리 '반에서 중간은 해야 해'가 기준이다. 질문이 이렇게 되면 남들이 뭘 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단지 뒤쳐지지 않기 위해 남들이 하는 일들을 똑같이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중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시험 성적을 확인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입시 결과에 지나칠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두는 우리나라에서 시험에 매달리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많은 부모님들이 사교육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늘 마음 속 깊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 가운데에는 자녀를 위해 진정으로 옳은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자리하고 있다. 부모님들의 의문과 불안 위에 입시체제와 사교육 마케팅의 장막이 두껍게 덮여져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러한 현실이 학교에서 다루는 지식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험을 위한 공부의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는 영재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재성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깊고 풍부한 흥미, 즉 학생의 내면에서 피어나 자란 호기심이다. 그리고 이 궁금함을 해결하면서 느끼는 희열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재성의 단초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내면'이다. 호기심이 학생의 마음 안쪽에서 자라나야 비로소 영재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외부의 평가에 자신을 맞추어 넣는 과정이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시험과 관련 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궁금해도 참는 게 현명하다. 영재성이 내면에서 외부로 분출되는 것이라면 시험은 외부에서 내면을 규정하는 강한 압력이다. '시험에 나오니까',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학부모들이 그토록 바라는 '영재성'의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왜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한 학교는 이렇게 상반된 대답의 한가운데 위치 해 있다. 쓸모없거나, 아니면 너무 중요하거나. 두 대답 모두 학생들에게 그리 좋은 영향은 주지 못한다. 수업시간에 엎드린 학생들에게는 '어차피 필요 없는 지식이야'라던가, '난 대학은 포기했어'라는, 두 대답 중 하나면 충분한 이유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의 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세상의 변화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의 내용도 항상 같지는 않을 것이다. 200년 전만 해도 이 땅에 살고 있던 아이들이 천자문과 공자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의 내용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그리고 무엇을 배울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끝없는 숙의가 필요하다. 100분토론의 주제로 '수학의 1단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가 올라올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안타깝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배울 것인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학교의 지식을 의미있게 만드는 일은 바로 그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가에 있다. 닭다리살 하나로 후라이드 치킨도, 닭볽음탕도 만들 수 있듯이 똑같은 수학의 1단원이라도 다루는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맛과 영양가를 지닐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 어떤 내용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학습 방법이 따로 있을까? 어떤 지역의 아이들에게 맞는 방법이 있을까? 4차 산업혁명시대에 알맞는 수업의 방법이 따로 있을까? 수업 공간에서 GPT를 이용하도록 장려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최대한 제한해야 할까?
'왜 저런 지식을 배우는가', 혹은 '저런 지식은 필요없어'가 아니라, '학교의 지식을 의미있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두고 논쟁해야 한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나아가야 하며, 학교의 지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의 에너지를 바로 '어떻게'로 돌리고 그 '어떻게'의 세부적인 내용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학교의 지식을 오로지 경쟁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교과목을 경쟁 종목으로 생각한다면 학교는 앞으로도 모든 지식을 지금처럼 '주입의 내용물'로 여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배움이 아니라 오로지 공정한 점수 매기기만이 강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앞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활동도 '어떻게 채점해야 하는가'의 문제 앞에서 좌절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오지선다의 객관식 문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평가의 방식에는 자율성이 필요하다. 절대평가를 할 수 있는 과목을 늘리고, 수행평가로 많은 부분을 채점할 수 있어야 수업시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지식을 다루어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한가지 더 강조할 점은, 그 평가의 결과가 지나치게 중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평가가 대학 입시에 직결되어서 너무 중요해지면, 평가의 객관성에만 모든 에너지가 투입되고 결국 다시 객관식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교육과정을 만드는 중앙 기관에서도 내용 요소만 선정할 것이 아니라 내용에 따른 여러 방법과 사례를 설득력 있고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자료를 제작하여 현장에 배포하여 많은 교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교과 내용에 대한 전체 내용요소를 교육과정에 담듯이 어떻게 이 지식을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같은 분량의 연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를 둘러싼 비판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학교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인 지식의 전수를 터부시 하지 말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맹목적인 비판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에 에너지가 집중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노력은 최대한 미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의 지식은 쓸모없어'가 아니라, '수학의 집합은 어떤 방법으로 배우면 좋을까'가, 오늘의 우리가 힘써야 할 토론의 주제에 가깝다.
노력하는 교사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과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결국 학교교육을 주도하는 것은 교사들이며, 어떤 대안이 제시되더라도 그것이 구현되는 것은 교사들의 손 끝이다. 학교의 지식을 더욱 가치롭게 하는 일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여 성과를 냈다면 그에 대해 충분한 사회적, 경제적 보상을 해 줄 필요도 있다.
다른 문제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학교에서 지식을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한 단면이 반영된 결과다. 인공지능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학교의 지식은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의 선택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