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똑똑한 노예를 길러내는 곳인가
학생과 이런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왜 수업에 참여하지 않니?'
'학교에서 배운 걸로는 성공할 수 없어요. 공부하는 아이들은 똑똑한 노예가 되는 것 뿐입니다.'
어떤 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이 책이요(자기계발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 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선생님도 알고 있어. 하지만 학교 공부를 성실히 하는 친구들이 '똑똑한 노예'가 된다는 말은 사실과도 맞지 않아. 학교 공부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더 많은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 일이야.
학생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똑똑한 노예'라는 말에 압축된 의미들은 여러 모로 차갑고, 또 시리게 느껴졌다. '일'의 가치가 오로지 돈으로만 환산되는 현실. 사람을 고용주와 노동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시각. 경쟁으로 가득한 학교와 사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사장님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똑똑한 노예가 길일 뿐'이라는 문장은 세상의 냉혹한 모습들이 얽히고 설켜 만들어 진, 회색빛의 무거운 돌덩어리로 보였다.
어떤 책이 세상을 이렇게 해석하여 이 학생에게 전달했을까. 제목을 언급하진 않겠지만, 그 책의 결론은 기존의 다른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너의 사업을 해라'(고용주가 되어라)
'투자를 해서 자산을 가져라'(주식이나 부동산을 소유해라)
'학교에서는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부지런한 노동자가 되는 방법 뿐이다.)
서점가에서는 '자기계발'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심지어 학교 도서관에도 자기계발에 관한 책들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학생들이 자기계발 콘텐츠의 논리에 노출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자기계발 콘텐츠가 책이나 TV프로그램, 유튜브 영상을 넘어서 1분 내외의 짧은 동영상으로 압축되어 유통되고 있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이제 스마트기기 이용자들의 시간을 탐내는 콘텐츠 장사의 한 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범람하는 자기계발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자기계발 도서와 영상은 그 종류가 너무 많아서 대표작을 꼽기 어려울 정도다. 다만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던 여러 책들을 분석 해 보면 쉽게 몇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들을 5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유감스럽지만 자기계발서들의 이 공통된 속성들은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첫째,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성공을 이루기 위한 몇가지 원칙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쉽게 일반화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일찍 일어난다.', '이 습관 하나로 인생이 바뀐다.', '남들이 1시간 하면 너는 2시간 해라....' 핵심적인 키워드는 콘텐츠마다 다르다. 하지만 몇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이것들만 지키면 인생에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다. 하지만 학생들은 개개인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며 객관적으로 처한 환경의 차이도 크다. '일찍 일어나야 성공한다'라는 간단한 생활습관조차 건강상의 이유, 혹은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지킬 수 없는 학생들도 있다.
또한 자기계발서들이 자신있게, 아니 용감하게 제시하는 이 몇몇 원칙들은 -당연하게도- 필연적인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때때로 성공은 운에 달려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거나 시대의 변화와 관련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난다고 해서, 혹은 몇가지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은 성공에 필요한 여러 조건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성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째. 자기계발서들은 특수한 몇가지 사례들을 지나치게 일반화 한다. 자기계발서들의 구조를 보면,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그들의 특징을 추론하는 방식의 논리구조를 보인다. 스티브잡스나 데일 카네기, 버락 오바마 같은 사람들이 단골손님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랐던 환경과 문화는 그 책을 읽는 독자들과는 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상반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타고난 기질과 신체적인 조건들이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가 스티브 잡스와 똑같이 살아간다 해도 누구나 스티브 잡스가 될 수 는 없는 것이다. 또한 성공한 사람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다는 특징들 또한 자기계발 콘텐츠를 쓴 사람들의 주관적인 관점이 투영되어 있거나, 아주 일반적인 자질(예를 들면 성실한 사람 이라는 정도)인 경우도 많다.
셋째,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성공의 의미를 지나치게 속물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성공'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광고를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절대 다수가 경제적 성공을 의미하고, 나머지 극히 일부는 경제적 성공에 뒤따르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언급하는 정도다. 물론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만들어 진 오늘의 세계에서 경제적 능력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삶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일 수 있고, 예술일 수 있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는 것일수도 있고, 어떤 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일수도 있다. 이들 모두 우리 사회 안에서 허용되는 일이며 하나의 삶의 목표로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들은 하나같이 '돈'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며,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학교의 교육은 돈의 현실을 기만하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삶의 진실을 감추고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과정에 돈의 가치를 폄훼하거나 금욕적인 성직자의 삶을 살아가라는 지침은 없다. 개인의 발전을 추구하되, 사회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 교육과정의 여기저기에 위치해 있다.(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을지는 여러 의견이 있겠으나.) 자기계발 콘텐츠들에게 성공이란 '돈과 명예'이며, 학교는 이것을 가르치는 데에는 철저히 무능한 기관일 뿐이다.
넷째,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실패의 가치를 지나치게 도외시한다. 자기계발서는 '성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기 때문에 실패는 성공에 관련될 때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100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했다면 그 실패들은 가치로운 것고, 실패 끝에 성공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간의 일들은 모두 시간낭비로 해석된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열심히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거나 3년간 진심을 다해 노력했는데 불구하고 원하는 대학에 낙방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학생들은 모두 '실패자'인 것이며, 그간의 시간은 모두 무의미한 것인가? 자기계발서들의 논리를 따른다면, '그렇다'
실패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자주 겪는 일이다. 열심히 준비한 수업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시험문제에 오류를 내기도 한다.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실패할 때가 있다. 그리고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학생에 대한 지도는 그 인연이 끝날 때 까지 말그대로 '실패'로 끝날 때도 있다. 학창시절 모든 학생들과 교사의 관계가 하나같이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던가? 그렇지 않은 경험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들이 모두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삶에서 어떤 일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오히려 보편적인 일이다.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성적이나 대인관계는 단골 손님이고, 동아리 활동이나 장기자랑 준비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많다. 어른의 눈에는 귀여워 보일수 있어도 학생들에게는 사뭇 진지한 일이다. 열심히 공연을 준비했는데 실수로 망쳤다거나, 동아리 활동을 위한 준비가 잘 되지 않았다던가 하는, 작고 소소한 실패들. 이 크고 작은 실패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까.
실패가 이미 현실이 된 상황이라면 지나간 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위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 걸음 나아간다면 실패를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장기자랑에서 실수로 공연을 망쳤더라도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노래와 춤 실력을 길렀다면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자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다섯째,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독자에게 돌린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기계발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이루지는 않는다. 아니, 그런 책을 통해서 성공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며, 최소한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입모아 이야기한다. '실패했다면 그건 내가 제시한 원칙을 실천하지 못한 너의 책임이다'. 이같은 집단적인 무책임이, 서점가의 자기계발 코너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문제는 이 논리가 좌절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성적을 올리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상대평가로 등급을 내는 성적 체제에서는 실력을 얼마나 쌓았느지가 아니라 '얼마나 남보다 더 잘 했는가'가 성적을 결정한다. 이미 모두 함께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이미 숨이 차오르는데,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자기계발의 논리에 따르면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잘못이다. 환경적인 요인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노력을 통해서 객관적인 '실력'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오르지 않을 수 있는 학교의 현실은 자기계발 콘텐츠의 세계에서는 발디딜 틈이 없다.
물론 자기계발서를 읽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거나 실제로 생활습관을 고쳐 성취를 이루는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생활습관, 이를테면 꾸준한 운동이나 협력적인 인간관계 같은 것이 사회적인 성공에 기여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의 사례가 자기계발 콘텐츠들이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모순을 상쇄할 근거가 될 수 있을 정도인지는 의문이다. 자기계발 콘텐츠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소수의 몇몇 사례를 자기계발 콘텐츠의 장점으로 일반화 하는 것은 무리한 논리적 비약이다.
과거에는 자기계발 콘텐츠의 영향력이 지금만큼 강력하진 않았다. 그것들은 대부분 두꺼운 책에 담겨 있었고, 그 책들을 진지한 태도로 끝까지 읽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TV프로그램에 나와서 성공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오락 프로그램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SNS가 보급되면서 자기계발 콘텐츠들이 이제 짧은 영상(숏폼, 릴스, 틱톡 등 플랫폼에 따라 명칭이이 다르다. 이 글에서는 '짧은 영상'으로 통칭한다.)의 형태로 소비되고 있다. 노출 빈도는 올라가고 파생되는 영향도 더 커졌다.
온라인의 짧은 영상들은 이미 그 속성만으로도 많은 문제들을 지적받고 있다. 도파민 중독, 인내심과 집중력 저하, 문해력 문제 등 그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런 짧은 영상의 주요한 내용물 중 하나가 자기계발이라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수도 있다. 짧은 영상들의 소재는 대부분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계발 영상도 그런 자극적인 소재 중 하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자기계발 콘텐츠의 성격과 짧은 영상이라는 미디어의 속성을 종합해 보면 그 대답을 간단하게 추론할 수 있다. 짧은 영상에서 재생되는 자기계발 콘텐츠는 성공, 특히 경제적 성공에 대한 이미지를 강렬하게 보여주고 그것이 아주 짧은 시간에 성취되는 것으로 묘사하며 그 방법은 단순화 해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슈퍼카를 타고 가는 부자에게 '어떻게 성공했어요?'라고 물은 후 '고객이 원하는 걸 팔았어'라고 말하며 끝나는 식이다.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자본주의적 욕망을 강한 이미지와 함께 충족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자극적이며, 중독성 있는 콘텐츠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학생들이 이런 콘텐츠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다. 성공에 대한 단순하고도 강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접하는 학생들은 짧은 영상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부딪치는 동시에 화면 속의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를 대비하게 되면서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알고리즘은 비슷한 성격의 콘텐츠를 반복해서 추천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짧은 영상들을 반복해서 시청하다 보면 그 콘텐츠의 메시지를 진리인 것으로 착각하며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조지 거브너의 컨티베이션 이론이 설명하듯)짧은 메시지에 대한 반복적인 노출이 그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의 변화와 성취는 짧은 영상처럼 금방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시청한 영상과 현실의 괴리는 좌절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숏폼 콘텐츠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을 시청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1분 내외면 끝나버리는 이 강렬한 콘텐츠는 깊은 생각이나 비판적 사고를 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 기존의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대부분 책이나 긴 강연이었기 때문에 그 논리를 접하면서 비판적으로 생각한 여지가 '그나마' 있었다. 하지만 짧고 강렬한 영상은 순간적으로 감정을 자극한 후 금새 휘발되어 버린다. 비판적 수용의 기회가 훨씬 적은 것이다. 하나의 문장이나 글귀를 가지고 밤새도록 고민하거나 친구들과 토론을 이어가는 모습은 짧은 영상을 통한 자기계발 콘텐츠에서는 비롯되기 어렵다.
결국 짧은 영상으로 접하는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희망보다는 좌절을, 동기보다는 무력감을 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 내용이 진취적이고 희망적이라 해서 시청의 결과도 같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휴대폰에 이런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면 그 효과에 대해 천천히 대화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처음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학교는 똑똑한 노예를 만드는 곳이죠'
학교를 삶의 터전으로 가진 교사의 입장에서는 꽤 충격적인 말이다. 이런 말은 어디서 흘러들어왔을까.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이 학생이 머릿속의 여러 여휘들을 종합해서 만들어 낸 문장일까. 차라리 그랬다면 감탄하고 또 긴 토론을 이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학교에 대한 이런 묘사는 자기계발 콘텐츠들의 단골 마케팅 문구다. 자기계발 콘텐츠들은 종종 학교 교육의 가치를 폄훼하는 방식으로 마케팅을 한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삶의 법칙'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부자 되는 법'
'열심히 공부하면 사장님만 행복하다'
'경제 시간에는 배울 수 없는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
등등.
이런 문장들은 학교 교육을 무의미하고 현실과 관계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안그래도 약한 학교교육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이 메시지들이 스마트폰의 짧은 영상들로 반복 재생되면서 그 불신을 반복해서 강화 해 나간다.
수업시간에 늘 엎드려 있는 학생들을 힘겹게 일으켜 세워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러한 자기계발서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물론 학교 공부가 경제적인 성공을 보장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다루는 여러 지식들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배우는 여러 덕목들은 처음부터 경제적 성공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학문의 지식을 배우며 지식을 늘리고 그와 관련된 사고력과 분별력을 기르는 것. 그리고 개인의 발전을 도모하되 공동체의 안녕에도 기여하는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이 학교가 존재하는 본질적인 목적에 가깝다. (몰론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비판과 의문이 있다는 것은 뼈아프게 생각할 대목이다.)
누군가에게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시간 낭비이며 학교의 규칙은 비합리적인 인습의 강요이고 교사의 수업은 무능함의 입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학교의 이 모든 요소들이 오직 자기계발서가 이야기하는 '경제적 성공'이라는 조건으로 평가되어 모조리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다면, 그리고 자기계발서의 논리로만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면 학교에서는 1교시부터 7교시까지 모든 수업을 주식과 부동산 투자, 그리고 일찍 일어나기 훈련으로만 채워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자기계발 콘텐츠가 학교 안으로 이렇게 쉽게 스며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학생들은 종종 이 논리에 젖어드는걸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 사회가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에 매몰된 획일화된 성공 기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회에서 만들어 진 이 기준들은 이미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스마트폰의 영상은 그 기준들을 재차 확인시키면서 자신만의 특별한 성공의 방법을 알려 주겠다며 시청자들의 시간을 훔치고 있을 뿐이다.
자기계발 콘텐츠는 판타지 소설 같은 면이 있다. 자기계발 콘텐츠의 이야기 구조를 보면 대략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초라하게, 혹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있다. 그 어떤 사람이 성공을 위한 어떤 비결을 깨닫는다. 방법을 깨달은 그 사람은 금새 큰 부자가 되어 부와 명예를 갖게 된다. 이 공식은 청소년들이 많이 즐기는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중화된 플롯이다. 자기계발서는 이것이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며 유혹한다. 판타지 소설의 현실 버전이니 학생들에게는 강한 유혹일 수 밖에 없다.
청소년기의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학생들에게 자기계발 콘텐츠의 판타지적인 이야기는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만화와 소설이 그렇듯 그 내용은 대부분 단지 소설인 경우가 많다. 책에서 그려지는 '대단한 성공'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큰 부자, 혹은 전교 1등이 되는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 처럼.) 그래서 자기계발 콘텐츠가 주는 희망의 환상은 대부분 실망이나 망각으로 끝이 난다.
공부 방법에 관한 자기계발 서적들도 비슷한 성격이 있다. 전교 1등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전제하고 책의 저자가 실천한 여러 방법들을 풀어 놓지만 그것을 읽는 학생들은 수준과 상황이 전부 다르다. 결국 전교1등의 수기는 전교 1등을 가상으로 체험하는 하나의 판타지 소설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독자들을 유혹하는 그 콘텐츠들 처럼 말이다.
* 자기계발 콘텐츠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혹은, 찾지 못했다.) 다만 청소년기의 심리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 - 예를 들면 에릭슨이나 머슬로우 등의 발달이론들 - 의 내용과 자기계발 콘텐츠들의 속성, 직접 보고 들은 경험들을 종합하여 이 글을 서술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자기계발 콘텐츠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이 콘텐츠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학생들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콘텐츠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해 볼 필요도 있다.
실천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기계발 콘텐츠를 주제로 하여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실시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본인이 접한 자기계발 콘텐츠를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그 타당성을 주제로 토론을 진행 해 볼 수 있다.
'이 영상에서 이야기하는 성공의 비결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영상에서는 돈을 버는 게 성공이라고 하는데, 그 생각에 동의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만으로도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계발 콘텐츠들의 진실성에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성공의 개념에 대한 토론도 의미있는 활동이 될 수 있다. 삶에서 '성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부터 의미있는 토론 주제가 될 수 있다. 성공이 삶의 목적이고 어떤 상태나 행동을 성공으로 정의한다면 성공 이후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 성취가 성공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이미 5살에 성공을 이룬 아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또한 이 세상에는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삶은 통째로 실패라고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자기계발의 논리를 하나 하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토론을 해볼 수도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자기계발 콘텐츠가 말하는 실패의 책임은 어디까지 개인에게 있는가.'
'숏폼 자기계발 콘텐츠의 내용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인가.'
이러한 활동들은 근래에 교육계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미디어 리터러시'교육의 일환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학생들은 강한 자기 확신과 자극적인 색채로 무장한 채 범람하는 쇼츠 영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 자기계발 콘텐츠에 대한 비판적 토론수업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들을 향한 방어막을 만드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 더 고민해 볼 문제는 지금처럼 학교 도서관에 자기계발서를 계속 비취해 둘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자기계발서가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뚜렷한 합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아직 교육 자료로서의 합리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자기계발 콘텐츠는 책과 강연, 영상 등 여러 형태로 소비되는 대중화된 상품이다. 상품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상품이 청소년들이 소비해도 좋은 양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부모님들은 마트에서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사줄 때 거기에 들어 있는 성분들을 꼼꼼히 확인한다. 행여나 해로운 성분이 있을까봐 노심초사하면서 건강을 위한 음식을 굳이 불편을 감수해 가며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는 책을 고르는 데에는 큰 고민 없이 '인생을 바꾸는 **가지 법칙'같은 책을, 그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서점의 가판대에서 꺼내어 준다. 먹을 것의 구성 성분을 보듯이, 자기계발서의 목차와 그 내용의 대강을 확인하는 일은 아이가 먹지 못하는 음식을 장바구니에서 빼내듯,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