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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입은 어른들이 만든 학교 판타지

미디어 속의 학교, 현실과의 아득한 괴리

by 소소인

미디어 속 학교, 그 익숙한 장면들


장면1.


정갈한 교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학생과 훤칠한 남학생이 학교를 거닐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 연예인처럼 멋진 학생들. 감각적인 광고의 한 장면 같은 캠퍼스. 두 학생을 인공으로 한 가볍고 예쁜 멜로 드라마가 펼쳐지려 한다.


장면2.


긴장되고 차가운 분위기의 교실. 회색톤의 화면. 학생들이 시험에 열중한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볼펜 소리와 시험지 넘기는 소리만 이따금 교실에 울려퍼진다. 시험지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학생들의 긴장된 눈빛, 사인펜으로 답안지에 마킹하는 모습이 스릴러 영화처럼 지나간다. 시험 결과에 울고 웃는 학생들. 1등을 제외하고 모두 절망하는 모습이다.


장면3.


학교에 좀비가 나타났다. 한 학생이 감염되어 좀비가 되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마구잡이로 물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학교. 생존만이 목표가 된 학생들은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이들의 목표는 오직 생존이다.


장면3가지는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콘텐츠들에 나올법한 장면들을 가상으로 꾸며 본 것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 이 세 장면 중 하나를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미디어 속의 학교는 이렇게 극적이고, 또 다양하면서도 전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학교는 모든 콘텐츠의 소재다. 예능과 버라이어티. 드라마와 영화, 시리즈물 등 모든 형태로 만들어진다. 드라마의 경우에는 모든 장르를 포함한다. 청춘 드라마, 잔혹한 스릴러, 좀비나 귀신들이 난무하는 호러물, 총알이 쉴새 없이 날아다니는 액션 영화 등등. 사랑이 넘치는 달콤한 천국에서 인정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지옥까지, 학교는 진짜 얼굴이 존재하는지 의문일 정도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잊을만 하면 다시 등장하는 학교 콘텐츠. 왜 미디어는 학교를 이렇게 애정하는 것일까?그리고 그 속에 그려지는 학교의 빛깔은 실제와 얼마나 가까울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미디어의 놀이터가 된 학교


왜 대중매체는 학교를 끊임없이 소환하여 콘텐츠로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지금은 이른바 '뉴미디어'의 시대다. 디지털 플랫폼인 유튜브와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필두로 하며 시청에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콘텐츠와의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것도 특징이다. 이에 반해 TV와 라디오, 신문은 이제 과거의 유산이 되어 이른바‘레거시 미디어’로 불린다. 그들은 뉴미디어에 콘텐츠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여러 주체들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곧 ‘뉴미디어’를 의미한다.


뉴미디어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회수와 시청 시간이다. 뉴미디어 콘텐츠 생산자들의 수익 대부분은 광고에서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조회수와 시청 시간과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콘텐츠 생산자들은 많은 시청자 수를 확보하기 위해 늘 골몰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학교는 너므나 좋은 소재다.


학교는 사람들 대부분이 삶에서 한번 이상,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경험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학교를 배경으로 설정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아가 학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몸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두배 가까이 되는 학부모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를 생업의 공간으로 하고 있는 교사와 행정직,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연관되어 있다. 아마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관련이 없는 사람을 찾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일 것이다.


뉴미디어 콘텐츠의 또다른 특징은 자극적인 연출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TV를 비롯한 레거시미디어들이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한 기관의 통제를 받았던 반면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는 이러한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자연스럽게 뉴미디어 콘텐츠들은 레거시미디어와의 차별성을 자극적인 콘텐츠에서 찾는다. 특히 넷플릭스에서 출시되는 오리지널 콘텐츠들을 보면 폭력성이 짙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문제는 학교가 콘텐츠로 만들어 질 때도 같은 공식을 따른다는 점이다.


교복을 입은 어른들의 판타지


클릭수를 위한 자극적 콘텐츠의 생산. 이것이 뉴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이것은 학교가 콘텐츠로 만들어 질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것은 학교의 실체를 왜곡하는데, 병원물이나 형사물과 비교해 보면 그 지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응급 상황으로 병원에 실려가거나,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경찰서를 찾아간다면 그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삶에 있어서 매우 극적인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병원이나 경찰의 세계를 다룬 콘텐츠들은 – 물론 여기에도 과장이 포함되겠지만- 극적인 설정에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학교는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해서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는 곳에 가깝다. 50분 수업에 10분 쉬는시간이 반복되는 지루한 공간. 그것이 학교다.


물론 학교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성적과 관련될 일, 학교폭력, 괴롭힘, 도박, 우울.. 학교가 가진 여러 얼굴들을 그려내자면 꽤 여러 권의 스케치북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미디어는 이런 학교의 얼굴들을 지나치게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학교폭력은 마치 조직폭력배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학생들 간의 주먹다툼은 격투기 선수들 사이의 싸움처럼 묘사된다. 최근에 나오는 작품들에는 성매매의 포주 역할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내 눈에는 뉴미디어 속의 학교가 어른들의 욕망을 학생들의 세계에 투영하여 만들어 낸 하나의 판타지로 보인다. 이 판타지와 실체의 간극은 얼만큼 벌어져 있을까.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미디어의 거품을 걷어내고 학교의 맨 얼굴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단정한 교복과 현실의 생활복 사이


선남선녀들이 모인 교실에 단정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질서 있게 앉아 있는 모습. 학교 드라의 단골 장면이다. 하지만 교복은 생각보다 불편한 옷이다. 셔츠와 넥타이, 자켓과 정장바지(또는 치마). 게다가 요즘 교복들은 학생들의 몸에 딱 맞게 맞추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오랜 시간 앉아서 생활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불편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학생들은 대부분 성장기여서 1학년 때 맞춘 교복이 2,3학년이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생활복을 착용하거나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생활한다.


헤어스타일이나 화장에 있어서도 평범한 학생들의, 수수한 모습이 훨씬 많다. 물론 과거와는 달리 두발과 화장, 복장에 대한 규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학생들의 외모가 비교적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화장품을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학생들의 전체적인 외양인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 과거에 두발규제가 처음 사라질 때만 해도 학생들의 머리색이 온통 울긋불긋해질 거라는 걱정(?)이 많았지만, 그런 학생들은 오히려 찾아보기가 어렵다. 외모에 있어서, 학생들이 선택한 것은 결국 생활하기 편안한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고등학교 때 외모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자란 세대가 많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학교란, 스포츠머리의 남학생, 단발머리의 여학생들이 가지런히 앉아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오늘날 학생들의 대부분은 편안한 생활복에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책상에 앉아 있다. 규율은 사라졌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단순화게 빚어진 학교 속 캐릭터들


학교 콘텐츠에서 가장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학생들에 대한 묘사다. 성인 배우들이 교복을 입고 애땐 분장을 한 채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학생같아 보이지 않는 행동과 대사들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기준으로 했을 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나이는 16~19세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성인이 있다면 자신이 16살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상상해 보았으면 한다. 그 나이대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오늘날의 드라마나 영화에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아직 때뭍지 않은 마지막 나이인 고등학생들의 모습은, 온라인 콘텐츠로 넘어오면서 교복입은 성인들의 무한 혈투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용의주도하고 무자비한 조직폭력, 스릴러 영화의 악역에 가까운 학교폭력 가해 학생 등 교복입은 성인들의 악마적인 모습은 학생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잣대에 정면으로 반하면서 더욱 극단적으로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치 도덕적으로 선해야 하는 성직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그 범죄가 더욱 악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또한, 콘텐츠 속의 학생들은 완전히 정립된 정체성을 가지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일관성 있게 나아가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대학진학, 정의의 구현, 때로는 좀비로부터의 생존 등등. 하지만 청소년기 학생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신'이다. 날마다 기분이 변하고, 목표도, 수업시간의 태도도 한 달 한 달 다른 것이 청소년기 학생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콘텐츠 속의 학생들에게는 '방황과 갈등'이 별로 없다. 이것은 어른들의 판타지를 학교에 녹인 결과이기도 하고, 작품의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기술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쨌든 화면속의 학생들은 외모 이외에는(가끔 그 외모도 이질감이 크긴 하지만)학생같아 보이질 않는다.


학교의 학생들은 매일 아침 등교하면서 지각을 걱정 하고, 방과 후 먹을 간식 메뉴를 고민하며, 수업 중 몰래 SNS를 확인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학생들의 대화를 살짝 엿들어 보자. 지금의 어른 세대가 열 여섯살에 나누던, 바로 그 대화를 지금의 학생들도 따라서 하고 있다. 학교의 어떤 시간이 너무 졸립다. 점심 급식이 맛있었다. 학원에 가기 싫다. 학교의 어떤 남학생/여학생이 있는데, 외모나 성격이 어떻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의 관계가 어떻다 등등. 우리가 추억하는 청소년기의 그 소소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중요했던 그 관심거리들. 어른의 눈으로 돌아보니 별 것 아니었던 그 걱정들. 이들은 여전히 학생들의 일상이요 가장 중요한 일들이다.


선과 악. 또는 유능과 무능으로 나누어 진 교사


학생들이 이정도라면, 교사들은 어떨까. 교사들은 학생들보다 더욱 단순화 되는 면이 있다. 선/악으로 나누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헌신적이며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와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학생들을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처럼 생각하며 부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악한 교사. 때로는 교사들을 유능함과 무능함으로 나누어 그려내기도 한다. 일타강사처럼 유능한 교사(일타강사를 유능함의 절대적 기준으로 보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수업시간에 가르칠 내용조차 숙지하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가 그것이다. 요컨대, 미디어 속 교사들은 선과 악, 유능과 무능 중 그 어딘가로 단순화된다.


하지만 교사들은 유동적인 존재다. 어떤 1년은 유능했다가 다른 1년은 무능하기도 하다. 또 어떤 학생에게는 너무나 좋은 교사이지만 또 다른 학생에게는 최악의 교사가 되기도 한다.


콘텐츠에서는 수업시간에 다양한 활동을 제안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교사가 있다면 항상 딱딱한 강의를 하는 교사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될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설문을 받아 보면, 강의식과 활동식 수업에 대한 선호는 구체적인 수치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대부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같은 수업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교사,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교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미디어에서 그리는 이른바 '바람직한 교사상'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미디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교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에게 헌신하는 존재다. 무슨 일이 생기면 24시간 대기했다가 바로 달려나가고 학생들이 요청하면 언제나 상담에 응한다. 현실 속에 이런 교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교사들에게도 개인으로서의 삶이 있다. 배우자와 자녀가 있기도 하다. 교사들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또다른 역할이 부여되는 평범한 시민이다.


욕망, 또는 희생으로 이분화 된 학부모


학생과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학부모들에 대한 묘사도 선/악으로 단순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 속의 학부모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성적과 대학 진학만을 추구하면서 끝없이 학원으로 몰아붙이는 부모. 또 하나는 자녀를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헌신하는 부모가 그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있고, 그만큼의 부모님들이 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이 양극단 사이의 어딘가에서 고민하는 존재이며, 그 모습도 하나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자녀의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한다.


어린 학생들을 학원으로 몰아가는 부모님들은 과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악인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학벌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자녀가 잘 살아가길 바라는 바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사교육 기업들의 마케팅과 육아 공동체의 분위기가 함께 영향을 준 결과이기도 하다. 자녀에게 사교육을 강요하지 않는 부모님들도 마음 한켠에는 자신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학생들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듯이, 학부모님들 역시 내적으로 끝없이 갈등하며, 또 변화하는 존재다.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것 처럼 하나의 얼굴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는다.


학교 콘텐츠의 긍정적인 얼굴도 있다


미디어 콘텐츠가 학교를 다룰 때 항상 부정적이고 자극적으로만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작품들은 청소년의 감정과 삶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공감과 위로의 통로를 만들기도 한다. 입시 스트레스나 친구 관계, 가족 갈등 등 현실적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고 학생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과장된 설정이 반드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할 때도 있다. 학교폭력, 교사의 과로, 학부모와의 갈등 등, 교육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콘텐츠 속의 학생이나 교사, 학부모는 세대 간 단절된 경험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미디어 속 콘텐츠는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할수도 있다. 그 결과가 잘 녹아들여 있는 콘텐츠는 학교에 대한 경험이 서로 다른 여러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학교를 다룬 콘텐츠들의 생산과 소비가 학교를 좀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쪽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제작자와 소비자가 모두 그 곳을 바라볼 때, 더 질높은 콘텐츠도 만들어 질 것이다.


미디어가 만든 학교의 이미지, 그 위험한 왜곡


미디어가 그려낸 학교는 -당연하게도- 현실과 큰 간극을 가지고 있다. 어른이 교복을 입고 연기한 학생, 어른의 판타지가 구현된 학교 공간, 단순한 캐릭터가 된 교사와 학부모는 그 어떤 것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대중 콘텐츠가 널리 소비될수록 학교에 대한 단순화 된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미디어에게 학교를 콘텐츠로 만들지 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시도할 수 있는 일은 학교를 다룬 콘텐츠를 다룰 때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하는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어른이 만든 콘텐츠를 어른의 시각으로만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관점에서 평론을 하고, 그것이 학생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또 자극적으로 콘텐츠화하는 것은 뉴미디어가 가진 기본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콘텐츠 속의 학교는 우리가 맞은 미디어 환경이 빚어낸 여러 모습 중 하나다.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은 미디어 환경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 속에서 함께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뉴미디어에 대한 리터러시 교육을 지속해서 내 나가야 한다. 읽고 쓰는 경험. 그리고 동영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경험을 학교는 제공 해 주어야 한다.


학교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인 눈으로 그 콘텐츠를 바라보고 또 소비하는 과정에서도 그 비판을 유지함으로서 창작자들로 하여금 학교를 또다른 방식으로 콘텐츠 화 하도록 유도하는 일일 것이다.


다만 미디어 속의 학교에 대해 학교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 한가운데에 있는 학교가 혼자만 거기서 역행하여 고고한 존재로 남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범람하는 미디어 콘텐츠의 바다 위에서, 학교는 나침반 없이 북극성을 바라보며 항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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