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전 봉하마을을 추억하다
안그래도 이젠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으니, 이제 더 이상 신문사 기자 신분이 아니니, 내가 더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5월. 매년 5월이면, 날짜가 이십 며칠을 향해 가면 나는 꼭 그날을 생각한다. 올해는 제대로 기억을 정리해 봐야지했는데, 마침 페이스북이 과거의 오늘 썼던 글이라며 이 글을 보여줬다.
5년 전에 쓴 글이다. 이 글을 써뒀었다는 것을 잊었었다. 다행이다. 지금보다 많은 것을 기억할 때 써둬서.
중요한 것을 모아두는 상자를 뒤졌다. 봉하마을에서 달고 다녔던 프레스카드는 다행히 있었다. 사진도, 취재수첩도 어딘가에 있을텐데 회사를 옮기고, 이사를 하는 사이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이젠 저 목걸이 하나가 내가 7년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물건이다.
그리고 나만이 아는 내 기억. 시간이 지나 더 많은 것이 흐려질 수 있으니, 오늘에라도 적어둔다.
7년전 그날. 논밭을 따라 끝이 안보이게 이어지던 그 검은 행렬. 울음 소리. 그래도 그분을 추억하며 미소짓고 감사하다 하던 사람들. 그날의 봉하마을은.... 특별했다.
2년전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5월 중순 1주일 휴가를 내고 한국에 갔다. 도착한 날 밤에 결혼 허락을 받고 상견례, 식장 예약, 웨딩드레스 결정, 한복맞춤까지 5일만에 해치웠다.
다음날인 일요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한 달 정도 있다가 결혼식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출국을 하루 앞둔 토요일 아침 미국에 있는 직장 동료와 메신저를 하다 편집국장이 전날 2주간 휴가차 한국으로 출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장의 한국 도착 예정일은 그날인 토요일 오후. 일요일 오전까지 한국에서 국장을 만나지 못하면 국제전화로 결혼 휴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국장이 머물기로 한 호텔에 전화를 해서 급하게 연락처를 남기고 동생과 아침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속보-노무현 전 대통령 등산중 추락사
"뭐래는 거야?"
우린 너무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 '추락사'는 곧 '자살'로 바꼈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엔 나보다 1주일 뒤에 휴가를 온, 그래서 1주일 더 머물다 복귀할 다른 기자 휴가 중이었다. 급하게 통화를 했다.
"OO씨, 자기가 봉하마을로 특파 되는거 아니야?"라는 말은 내가 했다.
그리고 저녁께. 집으로 전화가 왔다. 국장이었다.
"아 네, 국장님~"
"이게 무슨 일이냐. 나는 호텔 와서 알았어. 연락 잘했다. OO야, 봉하마을 가야겠다"
대꾸의 여지가 없었다.
"아, 네."
결혼 휴가를 받기 위해 남겼던 메모였는데, 내 사정을 모르는 국장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취재 지시를 기다리며 급하게 남긴 메모로 전달된 것이었다.
동생 옷장을 뒤져 까만 티셔츠를 찾아내고, 아빠에게 까만색 잠바를 빌렸다. 그리고 다음날 호텔에서 국장을 만나 간단한 취재지시를 받고 봉하마을로 향했다. 근처에 숙소 구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다행히 외할머니댁이 대구다.
덕분에 엄마와 대구로 가서 할머니 댁에 3일간 머물렀다. 할머니는 미국에서 정말 오랜만에 온 손녀에게 직접 밥을 해 줄 수 있어 기쁘다며 닭까지 잡으셨다. 엄마도 뜻하지 않게 친정 방문을 했다.
봉하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그렇게 봉하마을로 향했다. 생전 처음 가 본 동네. 기차역에서 내려 어떻게 가야할지도 몰랐고, 나는 전화기도 없었다.
기차역에 내리니 봉하마을로 '갈 것 같은'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기차역과 봉하마을을 오가는 버스를 기다리기도 했고, 택시를 기다리다 말문을 튼 사람들과 같이 택시를 타고 마을 근처까지 가기도 했다.
차량 통제가 된 곳에 내려주면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곳곳에는 노란색 리본과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그리고 그 길을 걸어 도착한 봉하마을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다리에 기브스를 한 한 청년은 일반사람 걸음으로도 20여분이 걸리는 길을 목발을 짚고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어머니와 함께였는데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대전에서 왔다는 그는 “손에 물집이 잡혔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면서 “노 전대통령 덕분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마지막 길에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소개했다. 대학 2년때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등록금 지원혜택이 생기면서 무사히 대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 왔으니 오늘 밤은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라는 청년의 말에 곁에 말 없이 서 계시던 어머니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마을 입구에 마련된 분향소에선 간간히 울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러운 통곡소리가 길어지길래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선족 교회에서 조문을 온 사람들이 목놓아 울고 있었다.
이들은 고인이 생전에 직접 조선족 교회를 찾아와 관계자들과 면담을 나눴던 것을 회상하며, 재임기간 동안 실제로 정책이 바뀐 덕분에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눈 분은 나이 많은 아저씨였는데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잊지 않고, 남기신 말씀대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봉하마을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나 장애인 조문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부부가 함께 조문을 온 경우나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았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 간단한 음식도 대접해줬다. "우리 마을까지 오신 분들 그냥 가시게 할 수 없다"며 마을 분들이 조를 나눠 음식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했다.
조문은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시간까지 길게 이어졌다.
‘낮은 사랑, 겸손한 권력, 강한 나라’
분향소 뒤편, 오가면서 가장 잘 보이는 그 곳에는 ‘낮은 사랑, 겸손한 권력, 강한 나라’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처음 봉화마을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는데 그 곳에 있으면서,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뜻은 더 깊게 마음에 와 닿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나는 경찰의 경비를 뚫고 한 언론사 사진기자님과 몰래 올라갔던 마을 뒷산에서 내려다 본 봉화마을 전경과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꼭 떠오른다. 뭐라도 먹고 가라던 정토원 분들과 조마조마하며 올랐던 부엉이 바위도 떠오른다.
그곳, 봉화마을에서 생각했었다. 그들의 눈물을 보며 생각했었다.
'대한민국 어느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
저토록 서럽게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우린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낮은 사랑. 봉하마을엔 그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눈물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