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밀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에서는, 다른 인력보다도 개발인력을 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개발실 인원들은 2-3년간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급여를 높여 좀 더 괜찮은 회사로 이직을 하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늘 본인 원외에도 예비 충원 인원을 더 확보해두여야 하는데, 워낙 사람 구하기가 힘드니
핵심인력이 나가면 그냥 공백이 생겨버리고 그로 인해 회사는 일정한 기술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평균적으로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연구개발 인력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영업총괄이사였지만, 어느 정도 공작기계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기에 면접자들의 기술력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시는 전무님 옆에 늘 같이 참석해서 면접을 보았다.
(초기 면접은 해당부서에서 보고 그다음 면접은 전무님과 내가 참석한 면접이었음)
전무님께서는 대기업 회계팀에서 근무하시고 퇴사하셨다가 우리 회사에 오신 분으로,
기계 분야는 잘 모르시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자리에 나를 참석시키고 나중에 따로
사안에 대한 내 설명을 들으시곤 했었다.
그날의 면접은 정말 새로운 기대주였다.
1차 연구개발팀에서 합격한 사람으로 2차 전무님 면접을 보는 사람이었는데
팀장급으로 이력서에서 경력부문이 거의 4-5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우수한 스펙이 가득했었다.
전무님께서 주신 이력서를 보고 나도 우리 회사에 연구개발 팀장급으로 괜찮을 수도 있는 생각을 했었고
전무님은 완전 제대로 된 사람이 왔다며 기대를 엄청 많이 하셨었다.
팀장급으로 지원한 사람의 첫인상은, 성실해 보이면서도 평범했다.
말하는 스타일이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잘하는 타입이라서
나는 연구개발 인력에 적합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전무님은 이미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시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채용 결심을 굳히신 걸로 보였다.
나는 그의 이력서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다가, 그의 경력 부분 중에서 우리 회사에 뭔가
도움이 될만한 항목을 찾아내게 되었고, 면접의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한 의도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당시 우리 회사에서 만든 기계가 어떤 신소재 가공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에
이 분야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면접자의 이력서에는 그 신소재에 대한 가공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경력사항이 있었고, 만일 이 부분에 어떤 특이한 데이터가 있다면,
내 일에 큰 도움이 될 거였기 때문에 나의 질문의 의도는 순수했고 정말 알고 싶었다)
전무님 : 주 이사, 나는 질문 다 했으니 주 이사가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하시면 되겠네요.
나 : 경력사항이 화려해서 기대가 정말 많이 됩니다. 그중에 현재 제가 당면한 문제에 도움을 줄 만한
내용이 있는데요, 우리 기계로는 그 소재 가공이 정말 어려워서 현재 테스트를 하면서도 공구파손이
많이 되고 있어 뭔가 특별한 가공방법이 있나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영복 씨께서는 쉽게 가공을 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조건으로 어떻게 하셨을까요?
김영복(지원자) : 아, 그 부분은 조금 기술적인 내용이라 이해가 잘 안 되실 거라서요.. 말씀드려도 될까요?
전무님 : 여기 주 이사가 웬만한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김영복(지원자) :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소재가 워낙 난삭재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 가공을 하면 가공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풀림 열처리를 해서 소재 경도를 낮춘 뒤에 가공을 하고 다시 열처리를 해서 소재 경도를 높이면 됩니다.
나 : 그 소재에다 풀림 열처리를 하고 가공을 한다고요??!!!
김영복(지원자) : 예! 그렇게 하면 소재가 물러져서 가공이 쉬워지고 그다음에 다시 열처리를 하면 소재의 경도가 다시 올라갑니다.
전무님 : 아, 그렇군요! 그렇게 가공을 하는 거군요! 우리는 그걸 몰랐으니까 여태껏 가공이 안되었나 봐요!
나 : 뭔가 잘 못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 비싼 소재를 풀림 처리를 하면 그 소재는 원래의 소재가 아닌 거가 되고 그 상태에서 가공을 하면 무른 상태에서 가공을 하는 거니까 가공은 되겠지만 그 소재는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공 뒤에 다시 경도를 높이기 위해 소재에 열을 가하면 가공 정도는 다 틀어져버리기 때문에 그 소재 자체도 쓸 수 없고 가공한 부품 자체도 사용할 수 없고... 남의 비싼 소재에다 뭐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김영복(지원자) : 아니,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도 문제없습니다. 제가 해봤습니다.
전무님 : 주 이사, 문제없다잖아요. 기술자가 말하는데 맞겠지요.
나 : 하하하하하하하하 잘 알았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영복 씨를 그날로 당장 채용하고 싶었던 전무님께서는, 나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하셨고
면접자도 그날이 입사를 결정짓는 확정되는 날인데,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나의 말에 전무님 얼굴만
쳐다보면서 전무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무님은 내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웃기만 하니, 뭔가 나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면접자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나를 따로 부르셔서 뭐가 문제인지 물어보셨다.
나는 김영복 씨의 대답은 이 분야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평가를 했고 그의 이력서에 있는 화려한 경력 속의 프로젝트들은 프로젝트의 결과까지 도달한 게 아니라 프로젝트의 이름만 나오고 김영복 씨는 참여를 했을 거라고, 나는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으로 인해 그렇게 판단을 했었다.
일반 관리직원을 뽑는 면접이 아니라, 연구개발 팀장급 인원을 뽑는 면접인데
기초지식도 없는 데다가 저렇게 뻔뻔하게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할 정도라면 이미 실력은 안 봐도 뻔한 거
아닌가!
전무님 : 나는 저 사람이 말도 조곤조곤하게 잘하고 침착하고 경력도 화려하고 스펙도 있으니 우리 연구개발팀을 잘 이끌어 줄 것 같은데, 주 이사는 뭐가 문제지?
나 : 전무님, 저분은 거짓말을 하신 겁니다. 남의 비싼 소재를 함부로 열처리를 한다니요? 겨우 1M 되는 사각 바 하나가 몇 백만 원하는 비싼 소재에 열처리를 해서 가공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 데다가 기술자가 아니란 소리입니다. 그리고 다시 열처리를 하면 이건 원래의 소재가 아닌 그냥 고철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뻔뻔스럽게 답변을 했다는 것은, 전무님과 내가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대충 말한 겁니다. 연구실 말단을 뽑는 거라면 급여도 적고 그냥 가르쳐서 쓴다면 되겠지만 팀장급이 저 정도라면 더 이상 물어보지 마시고 보내시면 됩니다.
이렇게 돌려보내기로 결론을 짓고 다시 면접 자리로 돌아왔더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김영복 씨가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김영복(지원자) : 만일 제가 이 회사에 입사를 하면 어떤 도움이 될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까 주 이사님께서 가공 시 문제 발생 공구파손에 대한 염려를 하셨는데, 제가 갖고 있는 특허기술을
기계에 접목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나 : 어떤 특허기술이 있으신가요?
김영복(지원자) : 초음파를 접목한 특허기술인데요, 공구가 가공을 하면서 나아갈 때 이 초음파를 활용해서 내부를 들여다보면 과부하받는 지점을 포착할 수가 있게 되고 그 부분을 개선하면 좋을 듯합니다.
나 : 공구가 가공을 하면서 직진할 때 초음파로 쏘아서 내부를 확인해보겠다고 하시니, 지금 듣기로는 조금 이해가 잘 안 가지만 혹시 그 특허기술 자료를 제게 보여주시면 제가 확인 한번 해보겠습니다.
전무님 : 아, 역시 다르시네요! 초음파 관련 특허라니 우리 기계에 접목하면 좋을 듯합니다.
(나 : 진짜 모르셔도 너무 모르시는 우리 전무님... )
김영복(지원자) : 그런데 사실 이 초음파 특허기술은 러시아 국방기술이라서 기밀입니다.
제가 친구와 함께 러시아 국방 프로젝트에 참여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자료를 드릴 수는 없고
다만 제가 입사하게 되면 제 머릿속에 있는 자료를 주 이사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 : 러시아 국방기술이요? 그런데 국내 특허를 받았다고요? 그럼 그 특허번호라도 알려주시겠어요?
대략의 요약이라도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영복(지원자) : 그 특허를 지금 제 친구가 갖고 있어서 연락은 안 되는데, 나중에 입사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전무님 : 러시아 국방기술이라니, 굉장히 흥미진진하네요. 그건 차차 알려주시면 될 듯합니다.
나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전무님은 그 사람의 말을 다 믿으시고, 내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복 씨 입사를 결정하셨고,
아마 그 사람이 맞는 말을 한 것인데, 주 이사가 몰라서 그 사람을 오해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았다.
그렇게 김영복 씨를 출근하라고 하고 돌려보낸 뒤에,
전무님은 나중에 나를 따로 불러서 도대체 왜 그렇게 비딱하냐고 대놓고 기분 안 좋은 티를 팍팍 내셨다.
그렇게 김영복 씨가 마음에 든다는 전무님의 태도와 말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간단하게
대답을 드렸다.
나 : 전무님, 저는 사실 미국 CIA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기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그동안 밝히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때 알았던 모든 내용들은 기밀이라 지금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전무님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 : 김영복 씨가 한 말이 지금 제가 한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전무님은 나의 말에 엄청 당황해하시고, 불쾌해하시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자기가
보여줄 거라고 하시면서 결국 김영복 씨를 선택을 하셨고,
그 사람은 전무님이 우리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에 엄청 큰 피해를 입히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