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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초달 Jan 03. 2021

최악의 상사, 참다못해 돌아이가 되었음

내 직원 앞에서 나를 깔아뭉갠 상사 대하기'미워도 주초달'

나는 수십 년간 한 회사에서 근무를 하면서, 여러 번의 보직변경과 그 고통스러웠던 IMF 시절도 견디었고,

임원이 아닌 상사를 제외한, 대표와 대표 역할을 하신 총 여섯 분의 상사를 보필했었다.

그리고 여섯 분의 상사 중, 다섯 분이 모두 S대 출신이었기에, 나는 돌 하나를 던지면 무조건

S대가 맞는다라고 농담을 하곤 했었다.

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였던 회사는, 성과 여부에 따라 회장님께서 늘 측근들을 대표로 내려 보내곤

하셨는데, 대부분 처음에는 모두 나에게 별로 탐탁지 않은 평가를 하셨던 것 같다.

그중의 한 가지가 바로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중책을 맡기는 걸 불안해하셨었다.

처음 대표였던 분은 늘 내가 "남자였으면"이었고, 그런 말은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나 혼자 파이팅하고 외쳐봤자, 남자 사원들보다 힘과 기동력이 딸렸고, 감정적인 폭발이 종종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는 치밀했고 누구보다도 촘촘해서, 늘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결과도 좋고, 머리도 스마트하고 해외 여러 지역을 다녀도 두려움이 없는 배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들의 눈에는 늘 "여자"라는 막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여러모로 나를 배려해 주셨기 때문에,

고맙고 편하기도 했지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같아 왠지 서글프기도 했었다.


회사는 국내에서 대형 기계를 제조하는 몇 안 되는 회사 중의 하나였고, 이런 업계에서 쇠 밥 먹은 사람들의 곤조는 유명했다. 모두가 경력과 경험으로 쇠를 다루고 뚝딱뚝딱 기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기계를 모르면 그들을 부릴 수가 없었고, 또 안다 해도 그들이 곤조를 부리면 회사가 생산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기가 센 분야였다.

이런 업계에 여자가 수십 년을 근무하고 게다가 총괄 영업이사라니, 최근까지도 나를 처음 만난 업체 사람들은 내가 여자인 것을 놀랍게 쳐다봤었다.


내가 만난 최악이면서도 반면에 측은했던 상사는 5년 전에 새로 부임하셨던 김전무였다.

화려한 스펙과 남다른 친화력이 장점이셨던 분이신데, 유난히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데다가

유일하게 나를 바닥까지 내려가게 했다가 다시 원상 복귀해주신 분이셨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복이 있으신 분인 것 같다.

회사가 제일 호황기였던 시절에 부임하셔서, 회사에 돈 쓰는 일을 많이 하셨고,

어찌 되었든 간에 회장님 눈밖에 나서 회사를 강제적으로 떠나 다른 계열사로 가셨지만,

회사를 엄청 고통스럽게 하고, 정작 본인은 그 고통스러운 열매가 맺히기 전에 떠나셨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을까


새로 부임하신 전무님은, 총 9개의 부서들과 개별 회식을 가지면서 친목을 도모하셨는데,

정작 전무님 옆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내가 속한 부서는 제일 마지막으로 회식을 잡으셨다.

나를 포함, 내 담당 부서의 구매. 조달/해외영업/AS팀 각 과장급 1명과 대리 주임들이 참석을 했고

전무님과의 첫 회식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식사는 일식 코스였고, 좋은 샴페인을 사 갖고 오신 전무님께서는 앞으로 잘해보자며

한 사람씩 샴페인을 따라 주셨다.

그리고 내게는 해외영업이 제대로 활성화가 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앞으로 해외영업을

활성화시킬 계획을 세분화해서 보고하는 게 좋겠다 등의 말씀을 하셨고,

내 직원인 해외영업 서 과장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난 얼음이 된 채로,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 전무 : 와.. 서 과장, K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네. 학점도 굉장히 높아. 이런 인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다니!

- 서 : 감사합니다.

- 전무 : 어때? 서 과장이 나랑 같이 해외영업을 해보지 않겠나? 그 정도 스펙이면 나랑 해외 쪽으로 한 30억은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해외영업 팀장으로 따로 부서를 만들어 줄게

- 서 :!!!! 네? 아... 저... 주 이사님이 잘하고 계시는데요, 제가 아직 기술영업이 부족해서.. 많이 부족합니다.

  (서 과장은 진심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 전무 : 주 이사? 에이, 주 이사가 어떻게 해외영업을 해? 이메일 좀 주고받았다고 영업이 되나?

  스펙이 좀 돼줘야지, 내가 말이야, 맘 잡고 3달만 공부하면, 기계 팔 수 있어! 내가 못할 거 같아?

  안 그래, 주 이사?


나는 간신히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예 맞습니다 상무님께서는 영국에서도 근무를 하셨으니 해외영업에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서 과장이 상무님을 보필해서 아주 잘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 서 : 이사님 왜 그러세요? 전 이사님 없으면 안 되는 거 알면서요.

- 전무 : 아이고, 우리 서 과장이 주 이사 눈치를 많이 보네. 주 이사, 직원들 좀 그만 닦달해요


그날 전무님과의 첫회식은, 아쉽게도 전무님께서는 회사 그룹내에서도 조금 이름을 날렸던 

나를 기를 죽이는 걸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회사 생활에서 어쩌면 전무님에게는 

최고의 지원군이 될 수도 있었던 나와 척을 지게 만드셨다.

내가 일하는 이 분야는 적어도 3년이 되어야 풍월을 읊고, 5년 정도 되어야 기술영업을 나갈 수 있는

어려운 분야였기 때문에,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나처럼 이 분야를 꿰뚫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인데.. 게다가 여자였기때문에, 나는 이 업계에 유일무이한 여자로 워낙 유명했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하신 전무님께서는 이런 나를 먼저 기선제압하시는 걸로 방향을 잡으셨던 것이다.


사실 공작기계 분야에서 세일즈엔지니어란, 그냥 간단하게 구할 수 있는 직원들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어렵사리 3~5년 가르쳐야 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다른 업체로 이직해서 갈까 봐 노심초사 

그들에게 엄청 공을 들이면서 조금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회사에서도 배려를 많이 하는 직원들인데,

나도 그만큼 혜택을 받았었고 또 내가 임원의 위치에 오르고나니 그런 직원들을 붙잡아두려고 

회사비젼도 제시하면서, 믿고 따를 수 있는 선배가 되기 위해 내 행동 하나하나 조심을 할 정도였었다.


전무님께서 저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대할 일은 아니었는데, 

본인이 워낙 오버스펙이었으니 별거 아니라고 우습게 보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일이 있은 후, 전무님과 나는 몇 번의 충돌이 있었고, 전무님께서는 단기간에 업무 파악을 마치실 속셈으로 속칭 내 머리에 빨대를 꽂았다. 매일 아침 9시부터 나와의 미팅이 약 2시간 있었고, 그 뒤로 각 팀장들이 전무님께 보고를 할 때는 무조건 나를 동석해서, 미팅이 끝나면 그 사안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묻고 전체 상황 파악을 해나갔다. 나는 하루에 거의 4~5시간은 전무님과 전무님이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느라 미팅 이사란 소문까지 돌 지경이었다. 이런 생활을 약 1년 정도를 하고 나니, 나는 거의 완전 돌아이가 되어버렸다.

회사에 가서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주 이사"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사내 인터폰 노이로제에 걸려, 인터폰이 올 때마다 내가 직접 못 받고 내 직원들을 시켜 누군지 확인하게 했다. 오죽하면 내 직원들이 이사님 사무실은 전무님 실이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장시간의 미팅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전무님께서 내게 아주 무리한 일을 강제로 하라고 지시를 하고 있었고, 나는 못한다고 버텼다. 나와 같이 영업부 서 과장과 이 과장이 회의에 참석을 했었는데, 계속된 전무님의 억지에 나는 참다못해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 전무님, 저는 더 이상 이 회의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나가겠습니다.

-!!! 뭐? 뭐라고?


나는 내 회의 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문을 나서면서, 참다못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 ##@@@$$#$$ 나 참내, 보자 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이나 어이없네 진짜!


너무 화가 난, 나는 분명 전무님 들으라고 그런 욕을 했고, 문을 쾅 닫고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챙기고 조퇴를 준비했다.

인터폰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고, 잠시 후 서 과장이 내 방으로 달려왔다.


- 이사님, 전무님께서 다시 오라고 하십니다. 그만 화 푸시고 얼른 가시죠..


- 서 과장, 나 지금 조퇴할 거야. 앞으로 전화 안 받으니 알아서 하고, 나 지금 개 돌아이가 되기 직전이니까

이쯤에서 끝내자고 해. 나 빼고 알아서 하면 된다고. 그리고 이런 심부름 하지 마.


서 과장은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다시 전무님에게로 돌아갔고, 난 그대로 조퇴를 해버리고

2일간 무단결근을 했다.

무단결근 이틀째 되던 날, 대표께서 내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대표께서는

"3일째 무단결근이 되면 사안이 커지니까, 내가 다 무마했으니, 내일은 출근하시라.

할 말이 있으면 하시되 윗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로 차분하게 말씀하시라,

뒤는 내가 책임진다"라는 문자를 보내셨다.

위의 문자를 받으니, 내 행동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무님께서 윗사람 몰래 교묘하게 나를 그렇게

고통 속에 몰아넣으셨지만, 내 행동은 적절치 못해서 부끄러웠다.

(내가 또 애새끼 짓을 한 건가...)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하니 사무실은 정적이 흘렀고, 나도 말없이 밀렸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트라넷으로 김 전무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 사무실 다시 나와줘서 고맙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차 한잔 하십시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전무님 실로 가서 전무님과 마주 앉았다.

- 주 이사,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고 그동안 주 이사에게 했던 행동들 미안합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해봤더니, 심한 부분이 있었던 것 인정합니다.

이젠 주 이사 판단에 많은 걸 맡기겠으니, 그만 마음을 풀고 잘해봅시다.

내가 잘못된 부분은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고치겠습니다.

- 전무님, 전무님께서 석 달만 배우면 기계 판다고 하셨으니, 어디 지금 인터넷으로 해외에 연락해서

미팅도 잡고 한번 팔아보시죠, 그렇게 팔릴 거 같았으면 제가 천대는 넘게 팔았겠습니다.

그리고 전무님께서 처음 회식자리에서, 서 과장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때 제가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무님께서는 해외영업이 안되니 서 과장을 격려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는 하지만, 서 과장 상사인 저를 서 과장 앞에서 그렇게 낮추고 비하하면서 서 과장을 추켜세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무님께서 매일 저를 회의로 불러들여, 제가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고, 

제가 해외 출장 갈 때마다 전무님이 같이 가셔서, 솔직히 제 업무에 지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무님께서 원하시는 게 제 일입니까?

제 일을 하고 싶으신 거면, 총괄 전무님 하지 마시고

그냥 제 위로 부서장 하시면 됩니다.


나의 거침없는 발언에, 상무님은 너무 충격을 받으신 듯 보였고, 눈에 경련이 일어났다.


하지만 거듭된 전무님의 사과로 그 일은 이렇게 일단락이 지어졌고, 

나의 이 발언 이후로 전무님은 본인의 안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업무적인 많은 부분에서 나와의 충돌을 피하셨다.

나는 그런 전무님께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업무적으로 전무님 보필하기에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나의 이런 진심이 통했는지 얼마지나지 않아 전무님께서는 '미워도 주초달'이라며 

나를 최고라며 인정해주시기에 이르렀지만, 그 분과 같이 근무를 했던 짧은 기간 동안 난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전무님은 다른 계열사로 발령이 나서 가셨지만,

나와는 지금도 가끔 전화로 안부를 전하기도 하면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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