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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26. 2020

유네스코 허리티지 트래킹

남한산성 한 바퀴

주말 아침이다. 달콤한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처럼 산행도 물 건너가고 만다. 그래서 게으른 몸을 채근하여 배낭을 챙겨 산으로 '대시' 하면 사람과 달리 산은 어떤 짝사랑이건 가리지 않고 받아준다.


산자락을 접어들어 가파른 오르막에서 가쁜 숨 몰아쉬며 뒤돌아 보면 지나온 길은 아름답고 앞을 보면 가야 할 길은 설렌다.


남한산성 체육공원에서 산성 남문으로 오르는 길엔 네댓 개의 약수터가 있다. 그중 한 곳만 식수로서 '적합'하고 나머지는 자격이 없다니 약수가 아니라 생각 없이 마셨다가는 오히려 몸을 해치는 독수 인 셈이다. 세상도 명실이 상부하지 않는 짝퉁이 수두룩하지만.


큰 뱀처럼 둥글게 장사진을 친 산성은 산 능선을 따라 끊일 듯 끊이지 않고 꼬불꼬불 길게 이어진다. 남문에서 오른쪽으로 제1, 2, 3 옹성을 차례로 지나고 반겨주어야 할 동문, 즉 좌익문은 해체 복원 작업 중이라 예전의 위용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해우소에 들러 찌꺼기를 버리니 몸은 한결 가벼워지는데 머릿속에서 이는 번잡한 잡념들은 여전히 어지럽다.

황진이 전설이 남아 있는 송암정을 지나니 성벽은 가파른 산 언덕으로 치달린다. 사방이 트이고 바람이 상승하는 산 모퉁이 언덕배기는 갈까마귀들의 아지트요 햇볕 좋은 숲 가장자리는 청설모들의 놀이터다.

동장대 터에서 북문으로 가는 산성길은 내리막이다. 북문의 이름은 전승문으로 외세의 침략을 반드시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염원을 담았다. 성문은 전시엔 굳게 닫히지만 평시엔 열려있다. 누구나 전시에 성 앞에 서면 생사를 몰라 두려워했을 터이니 평시에 열려 있는 성문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인가.


전승문에서 서장대를 향하는 길은 숯을 묻어 보관하던 서북능선 정상부의 매탄 터까지 오르막이다. 불을 댕기면 자신을 살라 불꽃으로 타오르는 숯처럼 필요한 때에 제 몫을 제대로 해내는 것들은 아름답다.

여기서부터 서장대까지는 장송들이 좌우로 늘어선 넓고 평탄한 길로 벤치 화장실 등 시설들이 두루 잘 갖춰져 있어 산정에 꾸며 놓은 작은 공원이다. 전시에 지휘소로 쓰이던 서장대는 너른 터 한가운데 단 위에 지어진 층간이 낮은 이층 누각으로 위용이 늠름하다.

서장대 출입문 옆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오랜 세월의 무게에 어깨 눌린 듯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버거운 세월을 견디고 있다. 몇몇 아줌마 아저씨들은 앞다투어 굳이 시멘트로 기브스까지 한 그 향나무 허리춤에 올라타서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들이다.

당나라의 수도였던 시안의 고찰 대안사 탑신 위에 올라가서 셔터 앞에 가부좌를 터고 자세를 잡던 중국인의 엿 기억이 오버랩되며 스쳐간다.

서장대에서 남문으로는 내리막 길인데 중간에 상춘정이 있어 자리를 펴 허기를 달래고 번잡한 생각을 버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연인인듯한 젊은 남녀에게 토마토를 하나씩 건네니 젤리로 답례하며 넉 달 된 신혼부부란다. 마음속으로 백년해로를 축원하며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져 부럽다는 말과 좋은 산행되라는 덕담을 주며 봄을 맞은 상춘정을 뒤로한다.

남문은 산성을 드나드는 출입문으로 산성마을까지 버스가 다닌다. 하루의 한가운데 정오 때가 가까운 시각이라 그런지 걸어서 오르거나 차로 도착한 사람들과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두루 섞였다.


어둑한 미명 이른 아침 산성으로 오를 땐 벌써 산성 쪽에서 내려오는 나이 많으신 젊잖이들만 가끔 마주쳤는데 대여섯 시간 산성을 일주하고 내려올 적엔 남녀노소, 그리고 관광객인듯한 일본인들까지 더하여 산행길이 제법 북적인다.

산은 저 멀리 골골마다 마을들을 품었고 마을은 골목 집집마다 사람들을 품었다. 하산길에 들른 백련사 화단엔 자목련 꽃망울이 터질 듯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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