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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Feb 22. 2021

한양도성 성곽길을 걷다(II)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Fortress Wall of Seoul) 성곽길 걷기에 나섰다. 3년여 만에 북쪽 구간에 이어 남쪽 잔여 구간을 두 친구와 함께 하기로 했다.

저번에 출발했던 독립문에서 인왕산의 선바위 부근 성곽길로 올라 돈의문 터 방향으로 성곽길 나머지 반 바퀴를 돌아볼 요량이다.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여태껏 백범이 소원하던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꿈속에 잠겨 있는 듯하다. 많은 얘기를 품고 있는 과거 속으로 들어가듯 독립문 아래를 지나 한양도성 성곽길로 향한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인왕사로 난 비탈을 오르다 보니 스멀스멀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징소리와 함께 망자의 혼을 달래는 위령 의식이 한창인 국사당과 진한 향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선바위 앞을 차례로 지나 바위로 덮인 인왕산 능선 중턱으로 올라섰다. 능선을 따라 길게 용틀임하는 한양도성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세먼지 탓인지 멀리 N타워를 머리에 인 남산이 푸르스름한 연무에 싸여 멀어 보인다.

한양도성은 1396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 의해 축조되고 세종, 숙종, 순조 때 보수공사를 거쳤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태조실록>은  태조 4년 윤 9월 13일, 도성 조축 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으며, 태조 5년 1월 9일, 장정 11만 8천70여 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게 했다고 한다.

태조 5년 1396년 음력 9월 24일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으로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숙청문과 그 사이사이에 광희문, 홍화문, 소덕문, 창의문과 수문 1개소 등을 모두 완성했다고 한다. 산 위를 지나는 험한 구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축성을 완료한 것은 지금의 기술력으로도 어림없어 보이는 불가해한 일이다.

긴 겨울잠에서  깨쳐 난 개구리처럼 휴일 봄 날씨에 들썩이는 마음을 못 이겨 뛰쳐나온 이른 상춘객들이 산정과 산 밑 쪽으로 길게 뻗은 성곽을 따라 끊이지 않고 오르내린다. 인왕산 줄기가 경희궁 뒤쪽 사직터널로 내려앉으며 늠름하던 성곽은 모습을 감추고 도시의 건물과 좁은 도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고종 때인 1907년 6월에 이완용 등의 주장으로 철거하기로 하여, 그해 9월 숭례문 북쪽 성벽, 그다음 해 3월 흥인지문 좌우 성벽, 9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 성벽 등 총 77간을 헐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 역사의 부침을 으며  훼손된 한양도성은 1974년 박정희 정권 때 복원사업이 진행되었고 현재 총 18,627m 중 산악구간 위주로 약 70%가 남아 있다고 한다.

역사에는 파괴자와 창조자가 있게 마련이다. 옛 것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한 문화혁명의 광기는 마오쩌뚱과 그의 홍위병들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지금도 버젓이 온/오프라인 공간을 헤집고 다니고 있고,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서슴없이 나라와 우매한 민초들을 팔아먹는 매국노들 또한 권력의 갑옷을 방패 삼고 허술한 법제를 은신처 삼아 여전히 활개 하는 현실이다.

안내지도를 살펴보니 사직터널 부근에는 성곽 안쪽으로 사직단, 단군성전, 이항복 집터, 세종대왕 탄생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성곽 바깥으로 <고향의 봄>을 지은 홍난파의 가옥,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임시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 가옥과 권율 도원수 집터를 둘러보았다.


1422년 세워진 한양도성 서쪽 정문인 돈의문은 1915년 도로 확장 공사로 철거되고 강북삼성병원 옆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병원과 바짝 붙어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의 사저 경교장이 거인 옆의 아이처럼 작아 보인다. 돈의문 박물관마을 건물 로비에서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서대문 터에서 남대문까지 구간은 대부분의 성곽이 헐려나가 길 위에 표시된 '한양도성 순성길' 표시를 더듬으며 걷는 길이다. 구 러시아공사관 터, 정동공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할 때 지나간 고종의 길, 이화여고, 정동극장, 덕수궁 담벼락, 배재공원 등을 차례로 스쳐 지난다.

평안교회 앞에서 서소문로를 건너고 소의문 터를 지나 세종대로 7길로 접어들자 '이충순 자결터' 동판이 눈에 띈다. 구한국군 시위대 참위 이충순이 군대 강제해산에 저항하여 대일(对日)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자결 순국한 곳이라는 설명이다. 허리 높이 성곽이 상공회의소 건물 축대 역할을 하며 흔적만 보여준다. 한양도성 서소문 구간은 끊어진 성곽처럼 아픈 상처 투성이다.

상공회의소 뒤쪽 내리막길이 끝나자 600년이 넘도록 수도 남쪽을 지키고 서있던 한양성곽의 정문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눈앞에 위용을 드러낸다. 숭례문은 태조 7년(1398년 2월) 건립되고, 세종 30년(1448), 성종 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를 하고, 1963년에 완전 해체 보수했다고 한다.

2008년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인 2월 10일 한 미치광이 늙은이의 방화로 불타오르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 방화사건으로 상층부 90% 훼손되었다고 한다. 세로글씨로 꼿꼿하게 서서 예를 갖추고 도성으로 드는 백성들을 맞이했을 현판은 화마로부터 무사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파수군이 지키고 서있는 숭례문루 아래로 들었다 되돌아 나왔다. 세월의 격으로 창연하게 빛나던 옛 색감은 윤기를 잃어 온데간데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숭례문을 뒤로하고 남산 자락으로 접어들어 성곽을 따라 오른다. 아동광장, 백범광장, 목멱산 봉수터, 서울 중심점, N타워 등 남산 곳곳은 남녀노소 상춘객들로 적지 않게 붐빈다.  하얼빈역에서 한국 식민지의 기초를 다진 통감부의 첫 통감이던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 동상이 의연하다. 바윗돌에 새긴 그의 글씨 '見利思義 見危授命'에서 한국사의 여러 대첩에 못지않은 장쾌한 기개가 느껴진다.


출발지였던 인왕산 자락 성곽이 미세먼지의 운무 속 빌딩 숲 너머 저 멀리에서 가물거린다. 남산 정상부에서 남소문 터까지 가파르게 내리닫는 성곽은 곳곳에 확연히 식별되는 축성 기법을 드러낸 보수의 흔적이 또렷하다. 보수 년월과 감관(监管)의 성명 등이 각인된 성벽도 눈에 띈다.

태조 5년(1396)에 시작된 성곽 축조는 전체 59,500자(약 18.2km)를 600자(약 180m) 단위로 나누어 총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조선 팔도에서 동원된 축성 인력을 각기 담당 구획별로 배치하여 공사 실명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성곽 주변의 국립극장, 반얀트리 클럽, 신라호텔 등을 스쳐지나 장충체육관 쪽으로 내려섰다.


이곳부터 오늘 코스의 종점인 동대문까지는 중간쯤에 광희문이 건재할 뿐 성벽의 흔적도 찾기 어렵다.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선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휘돌아 청계천에 놓은 성벽 하부구조물로 일제강점기와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졌다가 청계천 복구 때 복구해 놓은 오간수문(五間水門) 위로 놓인 오간수교를 건너 동쪽 정문 흥인지문에 닿았다.


한양도성 성곽길 나머지 반쪽을 완보하며 성곽 주변에 남아 있는 서울의 옛 자취를 엿본 감회가 남다르고 각별하다. 하늘 높이서 말간 얼굴로 우리 일행과 다섯 시간 17km를 동행한 반달이 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마장동 전봇대집에서 친구들과 3년 기별 석별의 잔을 나눈다. 아쉬움에 반쪽 달처럼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며칠 후면 휘영청 떠오를 정월 대보름달처름 티없이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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