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인산 May 02. 2021

샤오싱(紹興) 속으로

샤오싱을 향하여


지속되는 코로나 19로 인한 트러블도 많았던 한 주가 다 지나가고 있다. 오일절(五一节) 연휴를 앞두고 하루 휴가를 내고 샤오싱(绍興) 일박이일 여행을 기획했다. 중국 최대 연휴 중 하나인 노동절 연휴 첫날인 5.1일 당일에는 대부분의 기차표가 일찌감치 매진되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월(越) 나라의 수도였던 샤오싱(绍興)은 수향(水鄕) 교향(桥鄕) 주향(酒鄕) 법지향(书法之鄕) 명사지향(名士之鄕) 어미지향(鱼味之鄕) 등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호수와 운하, 술, 서예, 인물, 맛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곳으로 중국 내 최고 아름다운 도시 7위에 오르기도 한 곳이다.

일찍이 신석기 중기 소황산 문화가 시작된 샤오싱은 위에저우(越州), 회계(会稽) 산음(山阴) 등으로도 불렸는데, 치수(治水)로 유명한 우 임금이 묻힌 마오샨(茅山)을 후이지(会稽)로 개칭했고, 남송 고종이 샤오싱(绍興)이라 개원하면서 위에저우(越州)를 소흥부로 승격했다고 한다.



06:49 상하이 홍치아오發 창난(苍南)行 G7501호 까오티에에 올랐다. 고속열차 푸씽(复興)은 쟈싱(嘉興) 역과 항저우(杭州) 동역을 거쳐 예정대로 샤오싱 북역에 08:16분에 도착했다.

청나라 말기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중국 철도는 소위 '팔종팔횡(八纵八横)' 노선을 골격으로 하여 2020년 말 기준 총연장 14만 6000km에 달하는데, 그중 시속 250-380km로 달리는 고속철도는 3만 6000㎞로 연장 길이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열차가 소흥으로 가까이 들어서자 멀리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녹음이 충만한 너른 들판 여기저기 호수와 운하들이 차창을 스쳐 지난다. 중국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가히 남다른 소흥 북역 플랫폼에 여객들이 줄지어 서서 열차가 정차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역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철로 옆으로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이더니 역사 앞에도 온통 높다란 가림막을 두른 공사판이라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으로 들어서는 관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역사 앞 길게 줄이 늘어선 택시 승차장에서 순서를 기다려 택시를 잡아 타고 커옌(柯岩) 풍경구로 향했다.

샤오싱 시내에서 서쪽 10km 남짓 거리에 위치한 커옌 풍경구(柯岩风景区)는 커옌(柯岩), 젠후(鉴湖), 루쩐(鲁镇), 샹린(香林) 등이 모여있는 A4급 국가 명승지이다.

옛 채석장이던 커옌으로 들어서서 채석의 흔적이 또렷한 수인산(手印山), 그 앞 인공 연못 속 거대한 돌기둥 안에 새긴 마애불(天工大佛), 보희사(普喜寺), 샤오싱 출신 인물상들을 세워 놓은 공원(越中名士苑) 등을 둘러보았다.

청룡언월도를 꼬나 쥐고 서있는 관우를  닮은 재신을 모신 재신전(財神殿)과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 회랑이 인상적인 보희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희노우구애증욕(喜怒憂懼愛憎欲)으로 점철된 고해를 건너는 석가모니의 일생이 우리의 인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경내 윤장대의 윤장(輪藏)을 한 바퀴씩 돌리며 발길을 돌렸다.

한쪽 면이 깎여 나간 수인산(手印山) 깎아지른 흰 벽면에는 '柯岩'이라는 글자를 비롯해서 많은 글귀가 새겨져 있고, 절벽 가장자리 산기슭에는 한 손에 죽간을 들고 있는 문창 보살을 모신 문창각이 안겨 있다.

샤오싱 출신 관료이자 시인이었던 육유(陸遊, 1125-1210)도 <커샨 다오샹(柯山道上)>이라는 시를 남겼으니 언젠가 이곳을 다녀갔음에 틀림없다. 금나라에 중원을 빼앗겨 강남으로 밀려난 남송 때 조세 경감, 병비 정비, 인재 발굴, 탐관 호리 징계, 북벌과 중원 회복 등을 주장한 그는 애국 충신으로 숭앙되고 있다.

주은래의 '나는 소흥인이다(我是绍兴人)'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을 지나 치수로 이름을 떨친 대우(大禹), 루쉰, 왕희지, 철학자이자 교육가였던 채원배(蔡元培, 1868-1940), 양명학 창시자 왕양명 등 이 고장 출신 명인들의 동상이 서있는 월중 명사원(越中名士苑)으로 들어서서 한 바퀴 들러보았다.

선착장에서 손과 발로 노를 저어 운행하는 오봉선(乌篷船)이라는 작은 배에 올라 동한(东汉) 때인 140년 젠후(鉴湖)를 축조했다는 회계 태수 마쩐(马臻)의 흉상이 자리한 호수 속 작은 섬에 올랐다. 백옥장제(白玉长提)라는 돌 잔교를 건너 옆 섬으로 들어서니 분수대 형상의 병마 조각상이 눈 앞에 나타난다.

BC 473년 십 년의 와신상담 끝에 출정하는 날, 병사들 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이 보낸 술이 넉넉지 않자, 월왕 구천은 그 술을 강물에 붓고 모든 장병들에게 마시도록 명하여 마침내 사기가 충천하여 오나라 부차를 물리쳤다는 '투료노사(投醪劳師)'의 고사를 들려준다.



큰 배에 올라 지척의 호수 속 루쩐(鲁镇) 풍경구로 와서 샤오싱 출신 화가 천반딩(陳半丁, 1876-1970) 기념관에서 그의 작품과 삶을 잠시 동안 둘러보았다.

풍경구 출구 쪽을 향해 상점과 식당이 들어선 거리를 지난다. 각종 황주가 담긴 단지가 진열된 가게, 회향두(茴香豆)를 파는 가게 등과 함께 노신의 소설 <공을기(孔乙己)>의 배경이 된 무대가 된 주점 '함형주점' 간판도 눈에 띈다.

황주는 찹쌀을 보리누룩으로 발효시켜 만드는 양조주로 소흥주와 산동의 즉묵노주(即墨老酒)가 중국 양대 황주로 불린다. 소흥 황주는 알코올 도수 15-20% 정도로 황갈색을 띠며 이곳 젠후(鑒湖)의 물을 이용해서 만드는데, 당분 함량이 낮은 것에서 높은 것 순서로 위안훙주(元红酒 또는 状元红), 자판주(加饭酒 또는 花雕酒), 산량주(善酿酒) 샹쉐주(香雪酒) 네 가지로 구분한다고 한다.
 
또 소흥주는 단맛(甜味) 신맛(酸味) 쓴맛(苦味) 매운맛(辛味) 신선한 맛(鲜味) 떫은맛(涩味) 등 여섯 가지 맛을 가졌다고 한다.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을 담아 땅에 묻고, 나중에 그 아이가 시집갈 때 꺼내 손님을 대접했다는 '뉘얼홍(女兒紅)' 황주가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찬더우(蚕豆) 가게에서 콩이지가 술안주로 즐겨 먹던 후이샹더우(茴香豆) 한 봉지를 사들고, 그 옆 황주 가게에서는 친절한 여주인이 권하는 뉘얼홍 한잔을 시음하며 황주에 대한 궁금증도 조금이나마 해갈했다. 출구 바깥 식당에서 우육면 한 그릇으로 보채는 허기를 달래고 나니 2시가 훌쩍 지났다.


와신상담과 루쉰 구리
커옌(柯岩) 풍경구를 뒤로하고 버스로 루쉰 구리로 이동했다. 식당과 기념품점 등 가게들이 줄지어 선 긴 골목을 따라 예약을 해둔 유스호스텔로 가서 여장이랄 것도 없는 백팩 하나를 내려놓고 땀을 씻은 후 골목으로 나섰다.

루쉰 서로(西路)를 따라 월나라 궁전(越王台)이 있었다는 푸샨공원(府山公园)으로 향했다. 성채처럼 앞을 막아선 월왕대 문을 들어서서 푸샨 기슭 경사면을 따라 네댓 단의 넓은 계단 위에 춘추오패 가운데 한 명인 월왕 구천(句踐)의 전각(越王展)이 위엄스레 자리하고 있다. 월왕대와 월왕전 사이 너른 정원 한편에 초록 줄기 끝에 연보랏빛 꽃을 피운 부채붓꽃에게 잠시 동안 눈길을 빼앗겼다.

높은 전각 좌우에 있는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양쪽 벽면을 와신상담(卧薪嘗胆) 고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커다란 벽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쪽 벽에 굴욕을 잊지 않으려 걸어 둔 곰쓸개와 몸을 낮춘 채 칼을 쥐고 복수를 벼르는 구천의 모습이 보인다.



반대쪽 벽면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복수를 하고 나서 축배의 잔을 높이 치켜든 의기양양한 구천과 그의 책사 문종과 범려, 부차에게 접근해 오나라 재정을 탕진시킨 범려의 애첩이었던 서시(西施) 등의 모습을 세밀한 필치와 화려한 색상으로 그려낸 화공의 솜씨가 놀랍다.

그림 속의 서시는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월왕 구천의 오왕 부차에 대한 복수에서 핵심 역할을 한 그녀는 샤오싱 출신으로 시 서남 쪽에 서시 마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천 년 세월이 두 번 반이나 지나도록 미인의 대명사로 칭송받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용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각 문 앞에 서서 남쪽을 내려다보니 일망무제 거칠 것 없이 가슴이 툭 트이는 조망이 펼쳐진다. 월왕전 뒤 아름드리나무들로 녹음이 무성한 푸샨(府山)을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정상에 성채처럼 7미터쯤 높이의 화강석 기단 위에 3층짜리 누각 비익루(飞翼楼)가 자리하고 있다. BC 490년경 구천이 오나라를 제압한 후 지었던 경계 초소로 사면이 절벽처럼 가파른 비탈이라 전망대로서 적격으로 보인다.

봉래각(蓬萊閣) 풍우정(风雨亭) 등을 거쳐 소흥 박물관 쪽으로 내려왔다. 박물관 앞 월왕성(越王城) 광장에는 높이 12.8m 청동검 조각상이 서 있고, 그 앞에 놓인 40미터 길이 청동 장작더미 길(薪道) 위에는 BC 490년 이래 최근까지 샤오싱의 주요 역사적 사실 25가지를 새겨 놓았다.

중국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짐없이 유구한 역사의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는데,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는 말이 진리라면 중국이야말로 밝은 미래가 보장된 민족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전형적인 서민 주거지인 창교직가(苍桥直街)와 여권 사상가요 민주혁명 지사인 치우진(秋瑾, 1875-1907) 기념비가 있는 해방 북로(解放北路)를 거쳐 루쉰 구리로 돌아왔다.



루쉰(魯迅, 1881-1936)의 소설 <콩이지(孔乙己)>의 배경이 된 '함형주점' 간판이 루쩐(鲁镇) 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눈에 띈다. 소설 속 주인공 콩이지는 후이샹더우(茴香豆)를 안주 삼아 따뜻한 황주 두 잔을 들곤했다고 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두 집 건너 한 집이 황주 상점이고, 취두부 냄새가 골목 가득 진동하고, 불린 누에콩에 회향 계피 소금 찻닢 등을 넣어 졸인 특별한 맛도 없는 후이샹더우를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 바로 샤오싱의 루쉰 구리(鲁迅故里)이다.

상하이 문묘 부근에 있던 음식점 '콩이지(孔乙己)'에서 샤오싱을 대표하는 술 지아판지우(加饭酒)와 함께 회향두를 맛보았었다. 루쉰 구리 골목 입구 음식점에서 황주 대신에 하얼빈 맥주를 반주 삼아 저녁을 들었다.

화창한 봄 4월 마지막 날 밤이 무르익어 가자 들끓던 인파들이 어디론가 흩어져 한산해진 루쉰 구리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직전인 소흥 황주관(黄酒馆)과 거리의 임시 야시장을 서둘러 둘러보고 하룻밤 묵을 루쉰 구리 유스호스텔(鲁迅故里青年旅舍)로 돌아왔다.
 
루쉰을 비롯하여 왕희지, 육유, 우(禹) 임금, 왕희지, 채원배, 왕양명, 추근, 주은래, 구천 등 많은 인물들의 숲을 좌충우돌 정신없이 거닌 하루였다.


묵향 만리

노곤한 몸이 아침까지 달콤한 잠을 허락했다. 아침 호스텔 주변 식당에서 수이지아오(水饺)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공썅단처(公享单车) 앱이 말을 듣지 않아 자전거 대신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거리 모츠(墨池)로 향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버스를 탑승할 때마다 젠캉마(健康码)를 제시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감내할 밖에 도리가 없다.


지금까지 서예의 교본 중 하나로 남아있는 난정서(蘭亭序)를 남긴 서성 왕희지(王羲之, wángxīzhī, 307-365)의 숨결을 찾아 슈셩 구리(书圣故里) 골목길을 따라 모츠(墨池)로 향한다.  


좁은 골목 양옆으로 줄지어서 슈퍼 이발소 잡화점 옷가게 식당 공예품점 등 나지막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특이하게 장미꽃 축하 화환들이 쭉 늘어선 가게가 눈에 띄었다.


여금(茹琴)이라는 여성 예술가가 오늘 막 개업을 했다는 '청등 서화사(青藤书画社)'라는 작업실 겸 전시 공간이다. 나이 지긋한 축하객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다과를 들고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푸른빛 바탕에 백학(白鹤)이 수 놓인 치파오 차림의 그녀가 손수 맞이하여 안내를 하며 작품들을 소개해 준다.



모란 그림의 대가로 '강남 모란 왕(江南 牡丹王)'으로 불리는 여영림(茹永林)의 딸로 어림짐작 30대 후반으로 생각했을 만큼 5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그녀는 소흥시 공안국에서 26년 근무한 후 퇴직을 했더란다. 30여 년간 인두화에 몰두한 그녀는 '중화일색(中华一绝)'이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또 '바이두(百度)'는 그녀가 전국 공안미술가협회와 소흥 미술가협회 회원이며 2015년 <월중 명인보(越中名人谱)>에 이름을 올렸다고 전한다. 인두화 마노화 등 그녀의 작품들과 함께 2층 전시실 그녀 선친의 모란화 등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낯선 객에게 정성을 다해서 설명을 해주고 가통(家通)을 잇고 있는 그녀에 대해 일면 존경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청등서화사 지척에 모츠(墨池)가 있다. 사방 30여 미터 화강석 둑으로 둘러싸인 연못 한쪽 벽면에 커다랗게 쓰인 '墨池'라는 글씨가 이곳이 서예의 성인(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가 붓글씨 연습을 한 후 벼루와 붓을 씻어 연못 물이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그곳임을 알려준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는 발명가 에디슨의 말은 뛰어난 재기에도 불구하고 정진정진을 거듭하여 서성(書聖)의 경지에 오른 왕희지를 두고 한 말처럼 보인다.

모츠 물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향 특유의 진녹색으로 그 안에서 붉은빛 비늘의 잉어 몇 마리가 유영하고 있다. 할아버지를 따라 나온 손자 아이가 국시 가락을 조금씩 떼어서 연못 속으로 던지고 있다.


수셩구리(书圣古里) 인근 운하와 문필탑(文笔塔)

모츠 근처 왕희지의 집이 있던 지샨(蕺山) 기슭엔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여전히 증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슈퍼 아주머니가 권하는 황주 아이스크림(黄酒棒冰)에 정말로 알코올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면서 사찰 옆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지샨 공원(蕺山公园)으로 향한다.

지샨 공원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샨정(蕺山亭) 장원정(狀元亭) 문필탑(文笔塔) 등이 자리하는데, 그중 산정에 있는 문필탑은 서울 남산의 N타워처럼 샤오싱 시내 사방과 멀리 산군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의 명소이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는 울창한 산림 속으로 난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문필탑(文笔塔)이 홀연히 위풍당당한 위용을 눈앞에 드러낸다. 푸샨(府山)의 비익루(飞翼楼), 탑산(塔山) 응천탑(应天塔)이 문필탑과 함께 삼각으로 정립한 형세다.

탑문에서 실명 확인을 하고 탑 안으로 들어서서 2~5층으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 옆 벽면에 청명원(青明元) 시기 이 고장 출신 아름다운 용모의 문무과 급제자들이 객을 맞는다. 소주와 닝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원사(院士) 65명을 배출하였다니 가히 인물의 고장이라고 할 만하다.

계단을 오르며 층층 난간을 두른 탑 둘레를 한 바퀴씩 돌며 사방을 조망했다. 탑 주변 나무들이 탑 3층 난간 높이까지 연초록 빛 잎사귀가 무성한 지를 뻗쳐 올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성난 파도처럼 물결친다.

문필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맨 위층에는 황동제 큰 붓 한 자루가 놓여 있다. 난간으로 나서니 오금이 저리고 가랑이가 찌릿해 오며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북쪽으로 지산(蕺山)을 휘감은 환청허(环城河) 뒤로 따탄(大滩)이 멀리까지 물길을 펼치고 있다. 가까이 어제 찾았던 푸샨공원의 비익루를 비롯 멀찍이서 드넓은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군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루쉰 구리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모츠(墨池)로 발을 옮겼다. 슈셩 구리(书圣里)는 관광객들로 들끓는 루쉰 구리와는 달리 낮은 주택가와 운하가 어우러져 고즈넉하여 발길이 여유롭고 마음도 한결 느긋해진다. 루쉰은 위대한 소설가이자 혁명가로서 맹목과 집착에 가까운 추앙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상이나 이념에 구애됨 없는 서성 왕희지는 스스로 의연하고 세상의 이해로부터도 멀찍이 물러나 있어 한결 자유로워 보였다.

왕희지 기념관에 들러 잠시 그의 글씨에 흠뻑 젖어들었다. 서예의 성인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를 소흥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왕희지를 서성으로 칭한 당 태종이 그의 인품과 글씨를 함께 칭송했다니 글씨 솜씨 하나로만 그가 성인으로 추앙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낭만조차 사치스럽던 대학 시절 붓글씨 동아리 방에서 애꿎은 신문지에 먹물을 묻혀 내던 기억이 소환된다. 소질도 없는 터에 지금도 여전한 악필을 조금이라도 고쳐볼 요량으로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씻으며 구양순(歐陽詢, 557-641) 안진경(顔眞卿, 709-785) 조맹부(趙孟頫, 1254-1322) 등의 서책과 함께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를 뒤척였었다.


수셩구리(书圣古里), 뭉크作 <절규>와 루쉰 소설 속 삽화

강한 햇빛이 내려쬐는 루쉰 구리(鲁迅故里) 골목은 여전히 인산인해다. 인파의 물결을 타고 호스텔 쪽으로 걷는데 퇴실을 채근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퇴실 후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루쉰 고택으로 가서 미로처럼 복잡한 주거 공간들과 밭농사를 해도 될 만큼 규모가 있는 뒤뜰 백화원 등을 훑으며 둘러보았다.

루쉰의 소설 속 삽화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 고뇌와 고통과 절망을 온몸으로 절규하는 인간 군상을 흑과 백 극단의 두 색채에 담아낸 솜씨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치 뭉크(1863-1944)의 <절규> 연작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소흥대패루(绍兴大牌楼)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루쉰 기념관에서 그의 일생을 둘러보고 다시 인파로 넘치는 거리로 나왔다. 햇볕을 피해 들어간 골목 안 운하에는 유람객을 태운 오봉선(乌篷船)이 쉼 없이 오간다.

호스텔에 맡겨 두었던 짐을 찾아 샤오싱 북역으로 향했다. 항저우를 경유한 고속열차가 상하이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하이닝(海宁) 서역과 쟈싱(嘉兴) 남역을 지날 즈음 차창 밖에는 온전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송쟝(松江) 남역에서 정차하며 숨을 고른 열차가 상하이 홍챠오(虹桥) 역에 도착하며 일박이일 샤오싱 여행을 맺었다.

짧은 일정 동안 인파에 밀리고 시간에 쫓기고 더위에 지친 전투와도 같았던 여행이었지만, 풍성한 체험과 함께 백팩에는 루쉰 구거(故居)에 딸린 기념품점에서 루하이(汝海)라는 분이 내 이름을 운자(韵字) 삼아 쓴 즉석 싯구가 담긴 부채 하나도 들어 있다.
"张灯结彩 光灿烂 铉德高常 人钦"

사실 뜬금 없는 미사여구로 비행기를 태우는 그 싯구보다, 루쉰이 즐겨 인용했다는 부챗살에 적힌 글귀에 마음이 먹먹해 왔다.
"살면서 벗 하나를 얻는다면 무엇을 더 바라리
 이 세상 마땅히 같은 마음을 품고 바라보아야 하리"(人生得一知己足矣 斯世當以同懷視之)

취각을 마비시킬 듯 골목마다 코속을 파고들던 취두부의 진한 냄새 만큼이나 문향(文香) 묵향(墨香) 주향(酒香)이 그윽한 향기의 도시 샤오싱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자리하지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