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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May 16. 2021

땀에 젖고 감흥에 빠지다

닝보(宁波) 일일 기행

상하이 홍챠오 역에서 07:08발 닝보행 열차에 올랐다. 쟈싱 역과 항저우 동역에 각각 정차했던 열차가 다시 속도를 높인다. 닝보(宁波) 역에 도착하기 전 열차는 구면인 샤오싱 북역을 지나치고 샤오싱 동역과 위야오(余姚) 북역에서 한 번 더 정차했다.

차창 밖 너른 들판의 촌락 도로와 함께 작은 나룻배들이 물길을 오가는 풍경이 여기가 강남땅 수향의 고장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한편, 도심 외곽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스쳐 지나는 건축 중인 빌딩군들이 바야흐로 지금의 중국은 건설 공화국임을 실감케 한다.

열차의 2등석은 좌석 사이 여유 공간이 없고 좁다. 3열 좌석 창 측에 앉은 내 옆 복도 쪽 두 좌석에 나란히 앉은 장년 부부는 팔걸이를 독차지하고 감춰둬도 좋을 성싶은 금슬(琴瑟)을 다소 과한 애정 표현으로 과시하고 있다. 창밖으로 눈을 둘 수 있으니 다행이다

두 시간 여를 달린 열차가 속도를 늦추며 위야오 강(余姚江) 위로 놓인 철교를 건너 미끄러지듯 닝보 역으로 들어섰다. 역사 홀 규모는 족히 축구장 두어 개를 합쳐 놓은 크기는 될 듯한데, 파도처럼 밀려들고 밀려나는 인파로 붐비던 상하이 소주 남경 등에 비하면 아담하다는 생각조차 든다.  


닝보(宁波)는 BC 2000여 년 하나라 때 '은(鄞)'이라 불렸고, 춘추시대 월국 진나라 때 회계에 각각 속했고, 당송 이후 명주(州)로 불렸으며, 명나라 때인 1381년 현재 이름으로 개칭했으며, 고대 상형문자로 큰 종을 의미하는 '용(甬)'으로 줄여서 불린다.

닝보는 전형적인 강남 수향이자 중국 대운하 남단의 바다로 나아가는 항구 도시이다. 닝보(宁波)라는 이름에는 파도가 잔잔하여 바닷길이 늘 평안하길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북서쪽과 남서쪽에서 각각 흘러온 위야오 강(余姚江)과 펑화 강(奉化江)이 닝보시에서 만나 용강(甬江)으로 이름을 바꾸어 60여 리를 달려 북동쪽 바다로 흘러든다. 바다와 접하고 물길이 내륙까지 닿는 천혜의 무역항이라 할만하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1842년 남경 조약으로 상하이 광저우 샤먼 푸저우와 함께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된 것은 아픈 역사이지만 이 도시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중국 최대의 대외 물류 창구 역할을 수행하는 닝보의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는 세계 그 어느 항구도 필적하기 힘들어 보인다. 연간 화물 처리량 세계 제1위, 컨테이너 처리량 세계 3위(2020년 2,872만 TEU)를 각각 차지하고 있는 닝보 저우산 항의 기록들이 이를 말해준다.

택시를 타고 열차에서 미리 입장표를 예약해 두었던 닝보 박물관으로 직행했다. 중국 전역 대부분의 박물관들은 입장료가 없이 무료이지만 번잡을 피하고 적정한 인원을 유지하기 위해 시간별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아내가 닝보 출신이라 이곳에 눌러앉았다는 쓰촨 청두(成都) 출신 택시 기사는 우리가 당일치기 여행객인 줄 짐작치 못했나 보다. 닝보 볼거리를 묻는 말에 장개석 구거(故居)가 있는 계구(溪口), 오룡탄(五龙潭) 등 시내에서 멀찍이 떨어진 풍경구를 소개해 준다. 그러면서 고향 청두에 대한 자랑을 그칠 줄 모르고 늘어놓는다.

중국 3대 미녀의 고장이 청두, 중칭, 창사(长沙)라는 처음 듣는 얘기, 그곳 출신 여성들은 아리따운 외모와는 달리 성격이 까탈스러워 '매운 처자'라는 의미의 '라메이즈(辣妹子)'라고 불린다는 얘기 등도 흥미롭다. 밀레니엄 초반 북경에서 생활하던 때 우연히 듣게 되었던 <라메이즈(辣妹子)>라는 노래가 귓전에 맴돈다.  

그 노래는 후난성 샹시(湘西)의 작은 묘족 마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입지전적 여가수 송조영(宋祖英)이 불렀는데, 깐깐하고 높은 목소리로 성격 까탈스러운 처녀를 놀랍도록 절묘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辣妹子说话泼辣辣
辣妹子做事泼辣辣
辣妹子待人热辣辣
辣椒伴她走天下
매운 처자 말씨 한 번 매섭지
매운 처자 일 또한 억척스럽게 하지
매운 처자 사람 한 번 화끈하게 대하지
그 처자 매운 고추처럼 천하를 호령할 듯 하지
- <辣妹子> 일부 佘致迪 詞, 徐沛东 曲 -


닝보 역에서 5km여 남쪽 인저우취(鄞州区) 박물관 앞에 내리니, 너른 대지 위에 홀로 널찍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채색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이 견고한 성채처럼 눈앞에 우뚝 서있다.

연건평 3만여㎡, 길이 144m, 폭 65m, 높이 24m로 본건물 3층 위에 일부 전시실을 2층 더 올린 독특한 디자인의 이 건물은 2008년 완공되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무명의 건축가였던 왕수(王澍)에게 2012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수상자라는 명예를 안겨 주었다고 한다. 

미려한 박물관 외관에 반해서 정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관람객들과 마찬가지로 바깥을 한참 동안 두리번거리다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지붕을 천정 삼은 높고 너른 홀 옆 공간에서 박력 넘치는 음악에 맞춰 젊은 학생들이 벌이는 용놀이 퍼포먼스 한바탕을 감상했다.

닝보 박물관은 선사 허무두(河姆渡) 문화 유적을 비롯하여 청동기, 도자기, 죽각, 옥기, 서화, 금은기, 민속자료 등 6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듯 홀에서 곧바로 뻗은 너른 계단을 한발 한발 디디며 2층으로 가서 방향을 바꾸어 같은 형태의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섰다.

정원처럼 일부 공간을 비워둔 3층 야외에는 각기 특색 있는 전시관들과 커피숍이 자리한다. 그중 "岁月如歌 Tears as Songs"라는 주제가 붉은색 외벽 입구에 붙은 특별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전시관 안쪽 입구 바로 옆 벽면에 난데없이 6.25 전쟁 때인 1952.10.19일 상감령 전투에서 미군기의 총탄을 뚫고 돌진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15군 45사단 135 연대 2대 통신원 황지광(黃繼光, 당시 22세)의 그림과 함께 "抗美援朝 保家衛国"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순간 마음이 섬뜩했다.

상감령 전투는 중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얘기로 애국심을 부추기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2011년 후진타오 주석의 미국 방문 시 피아니스트 랑랑이 자신들의 전승기념 영화 <상감령(上甘岭战)>의 주제가 '나의 조국'을 연주하자 내용도 모르는 미국인들이 박수를 쳤다는 얘기에는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내부 벽면도 온통 붉은색인 이 전시관은 1949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닝보인들의 생활상을 당시 사용하던 다기, 그릇, 농기구, 악기, 장식품, 의복, 가전제품, 삐삐와 전화기 등 생활 도구와 함께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 내놓고 있다.

5-60년대 농기구와 농작물 재배에 관한 소책자들은 우리의 옛 새마을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결혼 필수 준비물이라는 식탁 옷장 침상 찬장 책상 각각 하나에 의자 네 개 등 소위 '36 티아오투이(条腿, 다리)'는 당시 소박했던 서민의 생활상을 잘 함축하고 있다. 70년대에는 '72 티아오투이'로 바뀌었다니 짧은 기간에 생활수준이 급상승했음을 암시한다.


죽각 공예 전시관은 그 이름과는 달리 죽각 공예품뿐만 아니라 갖가지 옥제품, 벼루와 먹, 시대별 도자기와 금속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밖으로 나오니 민속관 건물과의 좁은 통로 저쪽 끝 푸른 하늘에 새털구름이 곱게 수놓고 있다.


민속관에서는 이 지역 방언, 복장, 가구, 집안 장식품, 음식, 옛 포스터, 가족들이 모인 가정 모습, 춘절 단오절 등 풍속 미니어처, 푸줏간 약방 주점 식당 등을 재현해 놓은 거리 등 근대 이전 닝보의 모습을 세세히 관찰할 수 있다.


2층 청쓰(城市) 역사관으로 들어서니 닝보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 보라는 듯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가 잔잔히 흐른다. 동방신주(东方神舟)라는 부제가 붙은 이 역사관은 1973년 위야요(余姚) 강 유역에서 발견된 허무두(河姆渡)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부터 시작된 무역항 닝보의 오랜 역사를 여실히 보여준다.


닝보 위야오 출신으로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과 달리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을 중시한 양명학(陽明學)의 주창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을 여기서 만나니 박물관을 찾은 보람이 배가되었다. 마음(心)이 곧 이(理)라는 사상은 일면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과도 상통하며 궁극적으로 사물은 마음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유심론적 형이상학에 마음이 끌린다.


표해록을 찾아서
시간에 쫓겨 대충 서둘러 훑어보며 지나왔던 역사관을 빠져나올 즈음 문득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에 생각이 미쳐 넓은 역사관을 표류하듯 거꾸로 되짚어갔다.

도망간 범죄자를 추포하는 추쇄경차관 최부(崔溥, 1454-1504),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1488.1.3일 제주도를 출발하여 육지로 향하던 그를 비롯한 일행 43명은 풍랑을 만나 흑산도 부근에서 표류하여 저장성 린하이(临海) 현에 상륙했다.

그 일행은 온갖 고초를 겪으며 닝보 항주 소주 양주 회안 제녕 덕주 천진을 거쳐 북경에서 명나라 황제까지 알현하고, 산해관 요동을 경유하여 중국 체류 136일 만인 1488.6월에 전원 의주를 통해 조선 땅으로 무사히 생환했다고 한다.

성종의 명에 따라 그 역정을 기록한 책이 곧 최부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인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역사상 3대 기행문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사로무계(丝路无界, Boundless Silk Road)'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 전시관이 기다리고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2000여 년 전 진한(秦汉)과 고대 로마를 잇던 교역로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간 경제 문화의 교류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된 '실크로드'의 얘기를 들려주는 전시관이다.

일본인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가 수집한 다양한 전시물들을 통해 고대 지중해, 중국 서부, 메소포타미아, 이란, 아프간, 파키스탄, 인도 등 실크로드가 지나는 지역의 도자기, 금은 세공품, 유리제품, 불상 등 유물과 함께 문화, 예술, 종교, 풍습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실크로드 특별 전시관 관람을 끝으로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훌쩍 오후 1시가 지났고 찜질방에 들어온 것처럼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밀려든다.


라오 와이탄(老外滩)으로 향했다. 밝은 구름이 드리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심플하면서도 스마트한 디자인이 더욱 돋보이는 빌딩들을 보며 산뜻한 거리를 달리고, 펑화(奉化) 강 위 링치아오(灵桥)와 위야오(余姚) 강 위 신쟝치아오(新江桥)를 건넌 택시가 닝보 미술관 부근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오후 2시가 다 된 터라 아우성치는 허기를 달래려 미술관 옆에 번자체 글씨와 영어로 "餃 DUMPLING"라는 사각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간판과 함께 '수공수교(手工水饺)'라는 글이 적혀 있는 그 작은 식당에서는 때마침 시간에 쫓기고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듯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다.

닝보시 펑화(奉化) 위야오(余姚) 두 강이 합쳐져 용강(甬江)을 이루는 곳에 있는 라오 와이탄은 난징조약에 따라 다섯 항구와 함께 닝보항이 1844년에 개항되면서 조성된 시가지이다.

당나라 때는 4대 항구의 하나였고,  남송 때에는 중국 3대 항구의 하나로 오늘날의 세관처럼 대외무역을  관리하는 시박사(市舶司)를 두었다고 하니 내륙 물자의 중요한 교통로이자 무역항으로서의 닝보의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강변 보도 옆 강 위에 식당으로 쓰이는 듯 보이는 배 한 척이 묶여 있을 뿐 너른 용강은 오가는 선박 하나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강변 난간을 따라 '중동구(中东欧) 대표인물'이라는 글귀가 적힌 코페르니쿠스, 쇼팽 등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무슨 연유인지 궁금증을 풀 길이 없다.

강안(江岸)을 따라 높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골목은 상하이의 와이탄과는 달리 적막하기만 하다. 세계 최대 물류항의 자리는 이웃 저우산(舟山) 항에 내어주고 오랜 무역항으로서의 옛 명성만 간직하고 있으니, 한 도시의 흥하고 쇠함이 밀려오고 밀려나는 물결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 강의 합수점에 삼각주처럼 삐쳐 나온 강안에 뾰쪽한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곧추세운 강북 천주교당(江北天主教堂)이 자리하고 있다. 이 교당은 저장(浙江) 교구의 프랑스인 주교가 1872년에 건립한 오랜 역사의 성당으로 2000년 기준 900명의 교인이 있다고 한다.

천주교가 처음 닝보에 전래된 것은 400여 년 전으로 명나라 때인 1628년에 포르투갈 선교사가 닝보에 왔고, 1648년 이태리인이 성당을 세웠으나 청군이 불태웠고, 1713년 프랑스인이 세운 성당도 파괴되고 교인들은 살육되는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교당 마당을 지나 교당 옆 건물 입구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자신을 교무라고 소개하며 성당 안으로 안내하여 건립 시기와 건립자 등 성당의 내력과 교리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이어간다. 별다른 장식이 없고 예수님의 사역과 고난을 담은 열네 편의 성화가 액자에 담겨 좌우 벽을 따라 걸려 있고, 사역을 했던 신부님 무덤이 왼쪽 벽 안쪽 작은 공간에 놓여있는 것이 특이했다.

성당 밖으로 나와 길을 재촉하려는데 교무님이 마침 미사를 끝낸 교우들의 교제시간이 임박했으니 들어가서 차를 한 잔 들고 가라며 붙잡는다. 건물 2층 강당처럼 널찍한 방으로 올라가서 다과와 다기가 각기 한 조씩 가지런히 놓인 탁자들 가운데 빈자리로 인도되어 열 두어 명 남짓 교들과 마주 보며 앉았다. 옆자리 교우와 인사를 나누고 말을 트서 상하이에 있는 감가항 성당, 이승훈 신부, 주문모 신부 등에 대한 짧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어서 나이 지긋한 여성 한 분이 다기의 종류별 용도, 더운물로 헹구기, 차향 맡기, 차 따르는 예법, 차 마시는 법 등 다도(茶道)에 대한 설명과 실습을 진행했다. 우연찮게 교제의 자리에 끼어들고 엉겁결에 다도(茶道)까지 배우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잘 말리고 덖은 찻닢의 향을 맡고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맛을 음미하며 서로 진솔한 마음을 나누고 교감하는 예(礼)를 따르다 보면 홀연히 도(道)의 경지에 이르지 싶다.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는 길뿐 아니라 글씨에도 길(书道)이 있고 차를 마시는 데에도 길(茶道)이 있는데, 결국 그 길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좀 더 머물다 가라는 친절을 사양하고 교당을 뒤로하며 나서는데 때마침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짧았지만 결코 잊지 못할 닝보의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길손의 마음속에 주홍빛 낙관처럼 짙게 아로새긴다.


자전거를 타고 신쟝 치아오(新江桥)를 건너 3층 기와 누각 위로 도깨비 뿔처럼 시계탑이 솟아 있는 독특한 모습의 고루(鼓楼) 위에 올라 주위를 한 번 조망했다. 고루는 닝보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성루(古城樓)로 당나라 때인 821년에 세우고 여러 차례 고쳤는데, 1434년 태수 황영정(黄永鼎)과 1585년 태수 채귀이(蔡贵易)가 중수하면서 3층과 4층 처마에 건 '四明伟观'과 '海曙楼'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근처에 있는 당당하고 위엄스레 높이 솟아 있는 닝보 해관 주변을 서성이며 둘러보고, 페달을 밟아 위에후(月湖) 동편 고려사관(高丽使馆) 유적지 앞을 지나서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태양은 서쪽으로 한참 기울었다. 넉넉지 않은 시간, 강한 햇빛, 무덥고 습한 공기와 싸우다 보니 온끈은 땀으로 끈적대지만 닝보 역이 지척이고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한  터라 마음은 흡족하다. 넓은 위에후의 남쪽 끝을 향해 걸으며 호수 정자 수목 화초 수면에 어린 낙조와 건물 등이 어우러진 공원을 마음 가득 담아본다.


위에후(月湖) 남단에서 호수를 조망하니 닝보 해관 신구(新旧) 두 건물이 호수 속으로 떨어지는 낙조와 동무하자며  함께 수면 위에 드리운 그림자가 한 편의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일순 뜨거운 열기를 몰아내려는 듯 한줄기 바람이 스쳐간다.


위에후 서편 가장자리 닝보 기차역 맞은편에 월단(月坛)이 자리한다. 상하 이층 구조의 원형 단 위에 위에후의 상징인 5미터 높이 월신(月神) 조각상이 서있다. 여신 룩 원피스 긴 옷소매를 땅에 닿을 듯 늘어뜨리고 양팔을 머리 위로 둥글게 올려 양손을 맞잡은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어둠이 내리자 월신 동상 맞은편 길 건너 붉은 불빛을 발하는 '닝보짠(宁波站)' 글자가 역사 건물과 함께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검푸른 빛으로 짙어지는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을 월신(月神) 像이 맞이하는 장면을 일부러 연출한듯 선사하며 환송 인사를 대신하고 있다.

"멀리까지 나아가 손님 맞이하고 근처에서 고향사람 불러들이네... 홀로 즐기기가 함께 즐기기만 못하네.. 홀로 핀 꽃이 어찌 만발한 꽃 당하랴..."
- 위명륜(魏明伦, 1941-), <宁波 月湖铭>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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