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Aachen Rathaus
이십팔 년 전 여름, 아내와 함께 들뜬 마음으로 유럽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목적지는 유럽의 심장인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단기연수 길에 오른 것입니다. 내 옆 좌석에 앉았던 김 선생, 그는 우리 부부에게 창가 좌석을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후 말없이 창밖을 한없이 바라보던 김 선생, 우리 땅과 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쉬지도 않고 자신의 인생역정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에 독일로 파견된 소위‘파독(派獨) 광부’였던 그는, 은퇴 후 독일의 쾰른 옆 알스도르프라(Alsdorf)는 소도시에서 호프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 대신에 벨기에 자벤템 공항을 통해 돌아가는 이유는 집에서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때 석탄의 도시로 파독 광부의 성지와도 같았던 그 소도시는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세 나라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였던 부인과의 사이에 아헨대학 의대생인 아들과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딸 하나를 두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그 시절, 나와 아내는 초행인 유럽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비행 중 기대했던 오붓한 시간을 그의 인생역정 스토리에 버무려진 내 인내심이 대신 채워 버렸습니다. 김 선생은 한국에서의 젊은 시절과 파독 후 현재까지의 길고 고단했던 삶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지만,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김 선생은 비행기가 브뤼셀 자벤템 공항에 도착하자, 꼭 한 번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하며 내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서였습니다. 전화를 받은 김 선생은 그의 친구 K 씨가 손수 운전하는 낡은 폭스바겐을 타고 족해 세 시간 만에 택시를 앞세워 브뤼셀의 우리의 아파트로 찾아왔습니다. 연세가 60을 넘은 K씨도 아헨 근처에 거주한다고 했습니다.
브뤼셀을 벗어나 홀란드의 국경을 지나고, 시속 150킬로 넘는 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려 국경부근 아헨(Aachen) 근교의 알스도르프 마을에 닿았습니다. 알스도르프에 도착할 때까지 두 시간 반 동안, 그는 헤어졌던 절친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즐거운 표정으로 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달프고 외롭고 때론 서럽기도 했을 오랜 타국 생활이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나 키웠으면 그랬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는 일만 칠천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들 중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한 사람들의 고국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김 선생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김 선생의 집은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맨 아래층은 작은 호프 가게였고, 위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호프 가게에서 맥주를 두어 잔 내려주며, 그의 집 내부 구조며 생맥주가 수도꼭지를 통해 나오는 과정 등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학기 중이라 그분의 아들은 학교 기숙사에 머무른다고 했습니다. 선뜻 내어준 그분의 아들 방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나던 이국 소도시 그 여름날 아침은 햇살처럼 싱그러웠습니다.
그분의 딸은 일층 가게에서 바(bar)를 사이에 두고, 은퇴한 늙수그레한 손님 한 두 분과 마주 보며 체스를 두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맥주 한두 잔을 시켜 놓고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서 소일하는 은퇴한 동네 노인들의 따분함을 달래주던 그녀는 더없이 착해 보였습니다.
김 선생의 집에 머물면서 시시로 권하는 생맥주를 때를 가리지 않고 두어 잔씩 받아 마셨습니다. 가게 손님은 대개 은퇴를 노인들인데 매일같이 김 선생의 호프집에서 소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했습니다. 연금 시스템 등 사회복지가 잘된 탓인지 그들의 노후 생활은 편안해 보였지만, 조금은 무료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도착 이틀째 날, 김 선생은 재독 한인 광부모임의 회장선거에 다녀왔는데, 그의 가게로 몰려온 한인들을 서빙하느라 다음날 새벽 세 시경에 문을 닫고 잠을 청했더랍니다. 그럼에도 평생 부지런함이 몸에 밴 때문인지 아침에 우리와 거의 같은 시각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김 선생은 그날 한 시간여 거리의 쾰른(Köln)으로 차를 몰아 라인강과 쾰른 대성당 등을 우리에게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라인강 위를 가로지른 철교를 걸어 건너서 대성당으로 다가가자 두 첨탑이 끝 간 데가 없을 듯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성당의 미사 광경도 잠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라인강을 연신 오르내리는 거대한 화물선들은‘라인강의 기적’의 원동력인 듯 부럽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알스도르프의 김 선생 댁에서 이박 삼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너무 과한 친절과 대접의 황송함과 송구함을 면하려고, 더 머물라는 그의 제의를 사양하고 서둘러 벨기에로 돌아올 결심을 한 것입니다. 아헨역까지만 태워달라는 우리의 제의를 완강히 거부하며 브뤼셀까지 태워주겠노라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이국에서의 고생과 설움, 고국에 대한 그리움, 운전을 하면서 끊이지 않던 그 자신의 과거사와 주변 이야기가 귓전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브뤼셀에 도착하여 그의 제의로 생맥주를 두 잔씩 더 비는 동안에도 그는 가슴속에 남겨둔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 아쉬운 표정이었습니다.
귀국 후, 두어 차례 한국을 찾은 김 선생을 잠깐씩 뵌 적이 있지만 벌써 오래전의 일입니다.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가끔 그분이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생각나곤 합니다. 9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