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
1964년 독일의 레클링하우젠에서 태어난 하페 케르켈링(Hape Kerkeling)은 독일에서 잘 알려진 방송인이자 코미디언이다. 1980년대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풍자적 유머와 다양한 분장 캐릭터로 인기를 얻으며 활약한 그는 방송인, 배우, 작가, 성우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왔다.
2001년 초여름 어느 날 그는 돌연 짐을 챙겨 홀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다. 그의 약 6주일에 걸친 산티아고 길 순례는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출발하여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는 코스로 600km 이상을 도보로 이동했다.
이 여행의 기록을 정리하여 2006년에 출간한 책이 곧 『산티아고 길에서 나를 만나다』로, 원제는『Ich bin dann mal weg(나는 잠시 길을 떠납니다)』이다.
독일에서 출간된 후 여러 나라에서 번역 발간된 이 책을 들면서, 그는 왜 화려한 무대를 뒤로한 채 멀고 험한 순례로 나섰을까? 아니면 무엇이 그를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 위로 내몰았을까? 그리고 그는 그 길 위에서 무엇을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케르켈링은 역설적이게도 인기와 명성에 짓눌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상태에서 이 여정을 시작한다. 건강이 무너지고, 삶의 방향이 보이지 않던 그 시절,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고요하고 긴 여정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이 여정은 도망이 아닌,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 몇몇과는 깊은 정서적 교감을 통해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는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과의 짧고도 진솔한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어본다. 순례자들은 모두 다른 이유로 걷고 있지만, 그 안에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나는 지금의 나를 잃어버렸다. 다시 찾고 싶다.” 케르켈링은 낯선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선명히 마주하게 된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 속에, 삶의 본질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의 존재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하늘의 빛, 바람의 방향, 산과 길의 기울기가 그의 일상에 들어와 말을 건넨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던 자연의 언어, 그리고 그 안에 스며 있는 침묵이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된다. 그는 길 위에서 더 이상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존재로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다시 만나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산티아고 길에서 나를 만나다』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지친 현대인이 ‘삶’이라는 마라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영적 순례의 기록이다.
고통스러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종종 웃음과 위트를 놓지 않는다. 그 웃음은 피상적인 농담이 아닌,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유쾌한 미소였다. “이 길이 끝나면 내 인생도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그는 때때로 자신에게 그렇게 묻지만, 결국 길 위에서 얻은 답은 단순했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
종종 TV 프로그램이나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접하곤 한다. 스페인의 수호자가 되고자 했던 성 야곱 Saint Jacob의 여정에서 유래했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각지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요즘 우리들 주변에도 올레길, 누비길, 자락길, 갈매길 등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길들이 많고 또 새로이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굳이 멀리 해외로 나갈 필요도 없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둘레길로 나설 수 있다.
우리의 옛길이 지나는 산과 마을 강과 들은 저마다 빼어난 경승뿐 아니라 전설, 전쟁터, 역사적 인물이나 성인 또는 순교자의 흔적 등을 으레 한두 가지씩 품고 있다. 우리의 옛 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은 시간을 거슬러 옛 역사와 전설을 만나고 순교자나 성인들의 발자국
을 따라 걷는 순례의 길이나 다름없다.
꼭 산티아고가 아니더라도, 우리들 주변에는 나 자신과 대화하면서 내 내면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널려 있는 것이다. 집 밖으로 발을 내딛기만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