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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와르 영화처럼 아련한 홍콩의 기억

홍콩 스타의 거리 해변

by 꿈꾸는 시시포스

홍콩의 기억은 느와르 속 주윤발이 내뿜던 담배연기처럼 늘 잡힐 듯 말 듯 아른아른 한다. 셀 수 없이 여러 번 다녀온 듯 마음속에 아련히 각인된 그곳. 그러나 노트북 속 일기장과 사진을 뒤적여 보니, 실상은 고작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세미나, 또 한 번은 그로부터 7년 뒤 회의 참석차 머문 3~4일. 두 번 모두 낮에는 빽빽한 공식 일정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고,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서야 겨우 허겁지겁 이곳저곳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첫 방문은 2007년 1월의 끝자락이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해 서점에서 여행서를 한 권 집어 들고는 여덟 시 반 비행기에 올랐다. 네 시간이 채 못 되어 창밖으로 홍콩의 책랍콕 공항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리자마자 Mr. 웡이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와 함께 공항을 빠져나와,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듯한 대교를 건너 구룡반도와 홍콩섬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경이로웠다. 하늘 끝까지 자라난 빌딩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빛나며, 어딘가 현실 너머 미래의 우주도시 같은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

빅토리아 하버

호텔에 짐을 풀고 곧장 첨사추이(尖沙咀) 해변으로 나갔다. ‘스타의 거리’라 불리는 해안 산책로엔 이소룡의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스타들의 손도장 위에 손을 겹쳐보며 사진을 남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당산대형'의 이소룡, '취권'의 성룡, '영웅본색'의 주윤발, '패왕별희'의 장국영, '첨밀밀'의 장만옥, '중경삼림'의 양조위, '무간도'의 유덕화, '동방불패'의 임청하,... 별처럼 빛나는 스타들의 숲 속을 걸으며, 나 역시 이 도시의 작은 별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빅토리아 하버 너머로 보이는 홍콩섬의 스카이라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잠시 후, 스타페리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넜다.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구룡반도에서 홍콩섬 Central로 향하는 십여 분 남짓의 시간.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하나의 도시에 속하는 섬과 육지를 배를 타고 건너는 그 아쉬우리만큼 짧았던 시간이 아마도 홍콩에서의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었으리라.

배에서 내려 홍콩섬에 발을 디디자마자 트램에 몸을 싣고 빅토리아 피크(山頂)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산허리에는,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리듯 아슬아슬하게 선 초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곳 사람들의 건축혼과 예술적 기질에 절로 탄성이 났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가파른 비탈마다 저토록 높은 아파트와 빌딩을 올린 것은 결국 비좁은 땅과 많은 인구 때문이라는 것을. 현지인들에게 저 스펙터클은 낭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인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의 옆모습에 잠시 눈을 빼앗기면서도, 그 너머에 숨겨진 고단한 숨결들이 불현듯 느껴졌다.


트램 정거장 근처를 걷다 보니, WWF(World Wildlife Fund)라는 명패가 붙은 자그마한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반가운 마음이 들어 문을 두드려 보았다. 얼마 전, 이곳 직원이 한국에 있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표식들은 내 호기심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발길은 계획과 상관없이 어디론가 바삐 이끌리곤 한다. 비록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순간조차도 여행 속 특별한 발견이 주는 은밀한 기쁨 중 하나였다.

스타의 거리(좌)/빅토리아 피크에서의 조망(중, 우)
2009년의 홍콩거리(사진: kr.123rf.com)

이튿날, 언론의 플래시 세례 속에 열린 개회식을 필두로 세미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참석자들 틈새로는 북경에서 근무할 때 마주했던 몇몇 낯익은 얼굴도 보여 반가움이 일었다. 저녁 칵테일 리셉션이 끝나고, 나는 혼자서 밤바람을 맞으며 홍콩의 거리로 나섰다.

먼저 향한 곳은 스타페리 선착장이었다. 백 년이 넘도록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른 그 작고 낡은 배는, 번쩍이는 마천루 사이에서 오히려 고즈넉한 낭만을 풍겼다. 이어 발걸음을 옮긴 템플스트리트 야시장은 이름 그대로 사원이 있던 거리에서 유래된 곳으로, 해가 지면 온갖 잡화와 길거리 음식, 점술가들까지 모여들어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다음 날 회의가 마무리되고는 북경 시절 함께 근무했던 헨리와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호텔 맞은편 구룡공원을 천천히 산책했다. 빽빽한 빌딩 숲 속에서도 제법 너른 이 도심 공원은, 원래 영국군의 군영이었다가 시민들에게 돌려진 곳이라 했다. 탁자에 둘러앉아 장기를 두는 사람들, 너른 공터에서 음악에 맞춰 쌍쌍이 춤을 추는 남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홍콩이라는 도시가 내게 조금 더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온 듯 느껴졌다.

구룡공원 모습(좌, 중)/텐핀(甛品, 디저트) 가게(우)
2014년의 홍콩거리(사진: kr.123rf.com)

일곱 시 반 무렵, 헨리의 아내가 운전하는 차는 도심의 불빛과 조금씩 멀어지며 란타우섬 쪽으로 향했다. 란타우는 홍콩에서 가장 큰 섬으로, 북적이는 시내와 달리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한적함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렇게 찾은 어느 작은 식당에서 거위구이와 생선찜을 앞에 두고 맥주잔을 부딪쳤다.

헨리는 사진첩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때로부터 3년 전 베이징에서 홍콩으로 돌아온 후 가족과 함께 신장, 광서, 해남도까지 두루 여행을 다녔다며, 사진 속 풍경과 웃음이 가득한 얼굴들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그의 삶이 부럽기도 했고, 동시에 내 모습을 가만히 돌아보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홍콩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들렀다. 바다 위로 길게 뻗어 나간 다리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이후 들른 텐핀(甛品)이라는 디저트 카페에서 달콤한 망고죽과 요거트를 맛보았다. 홍콩 사람들에게는 이런 디저트 가게가 늦은 밤까지 문을 열어 주말 가족 나들이의 마무리가 되곤 한다 했다. 밤늦게 헨리 부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 촘촘히 흩뿌려진 홍콩의 불빛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홍콩 느와르 속 어느 거리의 장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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