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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

@사진: 운하 위 다리를 건너는 여행자들

by 꿈꾸는 시시포스


오래전 벨기에 브뤼셀에 체류하던 어느 여름, 주말을 이용해 아내와 함께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었다. 이른 아침, 낯선 설렘을 안고 브뤼셀 중앙역에서 출발한 열차에 몸을 실었다. 네덜란드 하면 튤립이 떠오를 만큼 이 나라는 오랜 꽃 재배의 역사를 가졌는데, 현재 세계 최대의 구근 생산국이자 꽃 수출국이기도 하다. 1630년대에는 튤립 구근 가격이 폭등했다가 급락하는 세계 최초의 경제 버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객차 안, 우연히 마주친 중국계 제약회사 직원 등(鄧) 씨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근무했다며 유창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듯했다.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지금보다 낮았던 당시, 유럽에서 나는 종종 짧은 중국어나 일본어로 인사를 받곤 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어김없이 “노스 코리아?” 하고 되묻는 이들도 많았다.


세 시간 남짓 만에 도착한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1889년에 개통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장엄한 건축물로, 도시의 첫인상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역 앞 거리로 나서자마자 진열대에 대담한 성인용 엽서를 내건 상점과 각종 섹스용품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톨릭이 주류인 벨기에와 달리, 이곳에는 신교적 개방성과 네덜란드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거리의 공기에 녹아 있는 듯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암스테르담 중심부

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도시이자 자전거와 트램의 도시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운하 유람선에 올랐다. ‘북쪽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이 도시는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수로와 1,500여 개의 다리, 그리고 90여 개의 섬이 이어져 있다. 본래 이곳은 12세기경까지만 해도 암스텔 강 하구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1270년경, 홍수를 막기 위해 암스텔 강에 댐을 설치하면서 ‘암스테르담(Amstel + dam)’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후 16세기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계기로 무역이 활기를 띠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1613년부터 체계적인 운하망 도시계획이 추진되어 지금의 반원형 도심 구조가 형성되었다.


유람선은 도시의 심장부인 담 광장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물길을 따라 천천히 흐른다. 수면 아래 짙은 무채색이 깔려 있고, 그 아래엔 17세기 황금시대의 찬란한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정오 무렵, 도시 서쪽 유대인 지구에 위치한 ‘안네 프랑크의 집’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이 집 다락방에 숨어 지낸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지금도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다. 소박한 은신처를 감싸고 있는 고요는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인간의 존엄을 웅변하고 있는 듯했다.

암스테르담국립박물과(Rijksmuseum in Amsterdam) 앞의 아엠스테드탐(I amsterdam) 조형물
운하와 다리 위의 자전거
암스테르담의 뒷골목

오후에는 ‘반 고흐 미술관’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의 대표 명소 중 하나인 이 미술관에는 200여 점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작품과 함께 고갱, 밀레, 르누아르 등의 거장들이 남긴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 종료 시간이 가까운 늦은 오후, 서둘러 입장하여 ‘해바라기’, ‘자화상’, ‘까마귀 나는 밀밭’ 등을 마주했다. 짧은 시간 속에서도 벽면을 채운 익숙한 명작들이 마음 한편에 깊이 각인되었다.


중앙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담 광장을 찾았다. 13세기 암스텔 강을 막아 만든 이 광장은 오늘날 왕궁, 신교회, 국가 기념비 등으로 둘러싸여 도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된 건축물 사이, 수많은 관광객들 속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비둘기 무리와 함께 광장 한복판에 잠시 머물렀다.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7월, 103 x 50 cm
고흐의 <자화상>과 <감자 먹는 사람들>
담 광장과 안네프랑크의 집(@photo: google)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기념품 상점과 상업시설이 모여 있는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북위 52도에 위치한 이 북유럽 도시는 여름철이면 밤 9시가 지나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중앙역에서 한 시간가량 더 머물다 밤 10시 넘어 브뤼셀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 풍경이 점차 어둠에 잠기고, 피로한 몸도 서서히 무게를 감춰갔다. 새벽 두 시경 숙소에 도착하니, 아침에 브뤼셀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 열쇠를 건네주었던 세 명의 한국인 여성이 졸린 눈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해 여름으로부터 열여섯 해가 흐른 2013년, 브뤼셀 출장을 마치고 귀로에 다시 암스테르담을 경유했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 눈발이 운하 수면 위를 흩날리는 겨울날이었다. 짧은 시간을 쪼개어 고흐 미술관과 국립미술관(Rijksmuseum)을 찾을 수 있었다. 고흐 미술관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국립미술관에는 렘브란트, 베르메르, 얀 스텐 등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The Night Watch)’이었다. 국립미술관 관람은 네덜란드인은 물론 유럽인들이 사랑하는 화가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이메르(Jan Vermeer, 1632-1675)를 알게 되고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카스파르 네츠허르 (Caspar Netscher,1639-1684)의 <어머니의 보살핌>/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야경> 앞에 선 관람객들

짐을 찾아 스키폴(Schiphol) 공항으로 가기 위해 중앙역으로 향했다. 기념품 상점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중앙역에서 담 광장으로 이어지는 담락 거리, 담 광장의 뒷골목의 좁고 붐비는 쇼핑 거리와 꽃 시장, 구근 시장, 관광객과 유모차를 모는 젊은 여성 등 현지인들로 혼잡한 홍등가의 좁은 골목, 커피숍에서 골목으로 번져 나오는 야릇한 헴프(hemp) 냄새...

무질서한 듯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도시, 거대한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을 떠올릴 때면 다채로운 색깔로 저마다의 빛을 발하는 무지개를 닮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97-07/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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