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창고를 들추다
일요일 오후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열차에 올라 피렌체로 향했다. 피렌체 도착 후 제일 먼저 유로버스 정류소를 찾아갔다. 피렌체에서 브뤼셀로의 귀환 티켓 역시 로마의 집시 떼에게 도난당한 터라, 브뤼셀행 버스를 탈 수 있을지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유로버스 티켓팅 사무실의 여직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티켓 없이는 버스에 탑승할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예약번호를 기억하고 있어, 브뤼셀 유로버스 사무실로 연락하여 Fax로 티켓 사본을 보내주십사 부탁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직원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브뤼셀에서 반응이 올지 오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3일 후 출발 당일에야 버스에 탈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물가는 로마에 비해 대체로 비쌌다. 지갑이 털린 터라 어느 호텔에 사정사정하여 6만 리라에 겨우 방을 하나 얻어 묵을 수 있었다. 그날은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쳤다. 다음날 피렌체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마침 월요일이라 아카데미아, 우피치 등 미술관들이 휴관이라, 오전에 성로렌조 교회의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황혼과 새벽’ 등을 관람하고, 호텔을 옮겨 잡았다.
오후에는 피사 당일치기 투어를 결행하기로 하고, 두 시경 피사행 버스에 올랐다. 피사의 사탑, 피사대학, 두오모 등 몇 곳을 둘러보았다. 사탑은 1172년부터 1372년까지 3차에 걸친 공사를 거쳐 완성된 피사 대성당의 종루(鐘樓)이다. 지반 침하로 인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서있는 탑은 금방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오후 일곱 시경에 피렌체로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초겨울의 추위를 느끼게 했다. 피렌체역 부근 맥도널드에서 아침 점심을 해결하고, 역 앞 노벨라 교회를 필두로 로렌조 성당, 두오모, 세례당,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키오궁전, 베키오 다리, 피티 궁전, 우피치 미술관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피에타>, 우피치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성 가족>, 젠틸레스키의<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다빈치의 <수태고지> 등 걸작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내일 귀환 버스에 탑승할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한 가운데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어제처럼 중국식당에서 맥주와 차를 곁들여 싸고 맛있는 저녁을 들고 하루를 마감했다. 삼십 년이 다되어가는 옛 기억이지만, 이태리 여행을 반추할 때면 아내는 피렌체 중식당 음식에 대한 찬사를 빠트리지 않는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날도 그 전날처럼 바람이 차다. 아침에 유로라인 버스사무실로 직행하여 탑승 가능여부를 타진했지만, 확답을 받지 못했다. 오전에 오니산티 성당(chiesa di San Salvatore di Ognissanti; 모든 성인들의 교회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등 몇몇 성당을 둘러보았다.
버스 출발 예정시각을 약 한 시간 앞두고서야 브뤼셀로부터 티켓 사본을 전송받았다는 직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오후 한 시경 브뤼셀행 버스에 오르니, 긴장이 풀리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아내도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로 올 때와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볼로냐와 밀라노를 지나고, 어둠 속을 달려 스위스-프랑스-룩셈부르크를 지나 브뤼셀에 도착하니, 날이 훤히 밝아왔다.
이번 이태리 여행은 나름대로 의미가 크고 인상 깊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와 피렌체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여행 중에 겪었던 예기치 못했던 사고도 어쩌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교훈이 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치부했다.
이에 더하여 또 한 가지 감명받은 것은 중식당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로마와 피렌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화상(華商)의 저력을 이태리에서도 목도하며, 세계무대를 뒤흔들 중국의 앞날이 결코 멀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1위의 인구 대국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로마'가 '중국'으로 대체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지금 다시 찾아보고 싶은 유럽의 도시를 들라하니, 단연 이태리의 로마와 피렌체를 택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다. 그 장대하고 무수한 유적과 거장들의 작품들이며, 분수 광장 공원 등 하나같이 인공과 자연, 과거와 현재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모습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매력은 로마와 피렌체에서 만난 시민들의 친절이었다. 경박하거나 무겁지 않으면서도 자유스럽고 유쾌하고 따뜻했던 그 친절.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상대방에 대한 작은 배려가 아닐까 싶다. 9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