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오래전 가을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는 파키스탄, 그 수도 이슬라마바드였다. 회의 자료로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떠났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그렇듯 새로운 땅과 사람을 만날 작은 설렘으로 조금씩 들떠 있었다. 당시에는 직항 편이 없었던 탓에 중국 신장위구르족 자치주에 있는 우루무치에서 스톱오버를 해야 했다.
천산 대협곡과 히말라야산맥 상공을 날아 파키스탄의 북단 깊숙이 자리한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 도착했다. 이슬라마바드 공항은 규모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어느 국제공항 못지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묻은 시간의 흔적은 마치 중소도시의 오래된 버스터미널 같은 인상을 주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기둥, 사람들로 북적인 대합실, 낡은 플래카드가 이 도시가 품어온 지난날의 시간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를 태운 중국남방항공 여객기가 착륙해 승객들을 내려놓자, 비행장 그라운드에 준비된 미니버스가 회의 참석자들을 재빨리 실어 VIP 수속홀로 향했다.
공항을 뒤로하고 도로를 달리며 차창을 열자, 바짝 마른 공기가 허파 속 깊이 스며들며 먼지 섞인 바람이 덮쳐왔다. 길가에는 두루마리처럼 긴 전통 복장을 두른 다소 꾀죄죄해 보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문득 저들은 무엇을 먹고살까, 하는 궁금증과 이름 모를 연민이 스쳤다.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인도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탄생했다. 그 수도인 이슬라마바드(Islamabad)는 '이슬람의 도시'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이 나라의 역사적 연원은 훨씬 더 오래고 깊다. 인더스 문명의 흔적이 남은 땅 위에서 마우리아 왕조, 그리스-박트리아, 쿠샨 제국 등이 흘러가며 무수한 이야기들을 뿌리내렸다.
1960년대, 이들은 카라치 대신 히말라야 산맥 끝자락에 새 수도를 세웠다. 그곳이 지금의 이슬라마바드였다. 반세기 남짓 지난 지금, 이 도시는 아직도 어딘가 모르게 아직 정돈되지 않은 미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레나 호텔에 도착여 짐을 풀기까지는 로비에서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호텔 입구에는 금속탐지기와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고 소총을 든 무장 경호원들이 느릿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묵직한 시선과 총구는 이 도시가 품은 또 다른 현실을 가만히 보여주고 있었다. 불안과 긴장이 무심히 일상이 되어버린 풍경 같았다. 한참 후에야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곧 회의 주최 측이 우리 일행을 위해 준비해 준 지프차에 올라 짧은 시내 투어에 나섰다. 처음 찾은 곳은 파키스탄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이었다. 박물관은 대단히 현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이 땅의 생태와 지질, 그리고 오랜 인류의 자취를 소박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수천만 년 전 이 땅을 밟았을 말라붙은 동물 표본과 화석, 살아남은 식물과 곤충 표본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자신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회갈색 흙길 위로 한낮의 해가 사정없이 내리 꽂히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는 다음날 아침, 회의장에 들어서자 파키스탄 측 대표가 그들의 언어로 경전을 암송하며 시작을 알렸다. 그 낮고 느린 운율이 호텔 회의실을 천천히 가득 채우는 동안 나는 이슬람의 기도가 가진 묘한 울림에 잠시 몸을 맡겼다. 회의는 여느 국제회의처럼 각 나라별 연례보고 발표와 분야별 성과 등 다소 따분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첫날 회의는 오후 네 시를 넘겨서야 끝이 났다.
여러 나라에서 온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전날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했던 문화유산박물관(Heritage Museum, Lok Virsa)을 다시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예상보다 훨씬 넓고 잘 정돈된 전시관이 나를 맞았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견딘 토기와 장신구, 이곳저곳에서 발굴된 돌기둥과 석상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 땅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전통 의상, 목공예품, 파키스탄 각 지역과 주(州)를 대표하는 그림,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자료 등이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과거와 전통을 잊지 말라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다음날 회의가 이어졌다. 골초인 P 과장은 커피 브레이크 시간마다 담배를 찾았다. 그를 따라 스모커들이 잔뜩 모여 있는 회의장 밖 호텔 정원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호텔 안에 남아 있는 참석자들과의 짧은 교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둘째 날 회의가 끝나자, 여러 대에 참석자들은 나누어 태운 지프차는 이슬라마바드의 북쪽 외곽 산길로 두 시간쯤 달려, 해발 2,300미터 고지에 자리한 머리 힐(Muree Hill)에 닿았다. 이곳은 19세기 영국령 인도 시절, 무더운 평야의 더위를 피해 영국 장교들이 이곳에 여름 별장을 지으며 머리(Hill Station)가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군부대가 관리하는 작은 골프장에 잠시 머물며 푸른 잔디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간단한 다과를 나눴다.
푸른 잔디와 낮게 늘어선 숲, 그 너머로 완만한 능선들이 굽어 보이는 고원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는 중국, 홍콩에서 온 낯익은 얼굴들도 있었다. 멀고 낯선 파키스탄의 산중에서 낯익은 얼굴들 다시 만나는 일은 왠지 모를 묘한 동질감을 불러왔다. 국적과 직책을 넘어, 우리가 모두 길 위에 서 있는 나그네라는 사실이 그 순간만큼은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간단히 차와 과자를 나누며 사진을 찍었고, 그 순간만큼은 각자의 국적도 직함도 잊은 채 길 위의 여행자들로만 머물렀다.
마지막 날 회의가 끝난 오후, 이슬라마바드에서 차로 한 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도시 탁실라의 중심지였던 곳에 자리한 탁실라 박물관(Taxila Museum)을 찾았다.
탁실라는 기원전부터 번성했던 도시로 마우리아 왕조와 그리스-박트리아, 쿠샨 제국의 숨결이 켜켜이 얽혀 있는 곳이다. 2천 년도 더 된 불상과 부조, 불탑의 파편 등 박물관 안에는 그리스-로마 양식과 불교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간다라 양식의 불상과 석조 부조가 가득했다. 그 돌조각들은 가난과 갈등으로 흔들리는 현재의 파키스탄을 잠시 잊게 했다.
저녁 찾은 파이잘 모스크(Faisal Mosque)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이 건립을 지원해 1986년에 완공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모스크로 이슬라마바드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이 모스크는 5,000㎡의 면적에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하얀 텐트처럼 펼쳐진 돔과 네 개의 첨탑이 멀리서 보면 사막 위에 피어난 거대한 꽃 같았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모스크 안으로 들어서자 낮은 기도소리가 벽과 천장에 울려 퍼졌다.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낮고 울리는 기도소리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 고요는 내 안의 분주한 마음까지도 잠시 누그러뜨렸다.
이윽고 고원에 자리한 식당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저녁을 들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낯익은 얼굴들은 이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로 하나둘 올라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돌아가는 비행기 창가에 앉아 검게 내려앉은 이슬라마바드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인도와의 카슈미르 분쟁, 탈레반·무장 세력의 위협, 군부와 종교·민족 갈등 등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운 땅. 일찍이 인더스 문명을 꽃피운 이 땅은 찬란했던 옛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평원 위에 희미하게 깜빡이는 불빛들은 마치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늘게 이어주는 오래된 별빛 같았다. 나는 그 별빛 아래서 내가 잠시나마 머물다 간 이 땅을, 마음속에 작은 흔적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