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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간을 걷다, 브뤼헤(Brugge)

'서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중세도시

by 꿈꾸는 시시포스

20세기를 건너 21세기의 강으로 들어선 지도 사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사집첩을 뒤적여 지난 세기의 추억 하나를 들춰 본다.


어제 오후 문득 결정한 여행, 아내와 함께 벨기에 북서부의 중세 도시 브뤼헤(Brugge) 탐방을 결행키로 했다. 브뤼셀에서 서북쪽으로 9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당일치기 탐방에 적당한 거리이다. 아침을 느긋하게 들고 브뤼셀 센트럴 역으로 향했다. 낯익은 기차역에 도착해서 '목적지 브뤼헤, 출발 시각 오전 11시 20분'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충북대에 다닌다는 K 씨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브뤼헤에 도착했다.


13~14C 서구 유수의 상업도시였던 브뤼헤는 인구 약 11만 명의 운하도시로 '서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리며 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요 산업은 맥주 제조, 레이스 가공, 관광 등이라고 한다.

터원형 운하로 둘러싸인 브뤼헤 도심은 사방 1~2km 정도로 그리 넓지가 않아 걸어서 둘어보기에 충분하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동화책 속 그림처럼 아기자기했고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아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마르크트광장과 종탑(좌, 중)/자수하는 여인들(우)
브뤼헤의 운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집들이 줄지어 있고, 크고 작은 분수와 광장이 시야를 채운다. 도시의 중심, 마르크트 광장에 우뚝 선 종루는 마치 시간의 망루처럼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좁은 운하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유람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마차, 노천 음식점, 공원과 숲, 뾰족한 첨탑의 고딕 성당들… 모든 것이 마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거리에는 브뤼셀처럼 초콜릿 상점이 많고, 창문틀에 예쁜 자수를 걸어둔 자수 가게들도 많이 눈에 띈다. 멤(Memling) 미술관은 입장료 100프랑에 비해 소장 작품의 수와 규모는 변변치 않았지만, 반 에이크, 한스 멤링, 다비드 같은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마주할 수 있어 감동이 컸다. 화폭 너머의 색채와 시선이, 마치 수세기 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생생히 살아있는 듯했다.

Hans Memling(1433-1494) 作 'Mystical marriage of Saint Catherine'(좌)/'Sibylla Sambetha'(우)
얀 반 에이크 형제 作, 1432년, '신비한 어린 양의 경배(Adoration of the Mystic Lamb)', 겐트 대성당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대개 그랑플라즈 인근에 있는 '오줌 누는 아이' 동상을 찾는다. 그리고 대개 앙증맞은 크기의 동상에 잔뜩 품었던 기대가 헛웃음으로 바뀌며 미소를 짓는 경험을 하게 된다.


조용하고, 고즈넉하고, 깔끔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브뤼헤는, 한때 찬란한 번영을 누렸던 도시답지 않게 ‘덧붙일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이’ 도시이다. 브뤼셀의 오줌 누는 아이 동상처럼 조금의 과장이나 허장성세도 없이 조용히 시간을 품은 채, 자기만의 숨결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 기차 편은 약간의 연착으로 9시 10분에 출발했다. 우연히 만나 탐방길을 함께했던 K 일행과는 midi 역에서 작별하고, 열차에 몸을 싣고 어둠을 뚫고 브뤼셀로 향했다. 과거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 브뤼헤에서의 한나절 여행,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 중세 도시를 살짝 다녀온 것 같은 즐거운 착각에 빠진 한나절이었다. 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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