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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19. 2020

시시포스의 저녁 산책

초량동 이바구길

일과 후 자투리 시간을 고대했다.


일과 후 자투리 시간을 고대했다. 그것은 시시포스처럼 일상의 굴레에 매여서 사는 인생들에게 주어진 짧은 위안이기 때문이다. 일곱 해 전 늦겨울 부산으로 내려와 일 년 남짓 머물렀었다.

그 후 부산의 옛 기억을 되돌아볼 때면 특별한 것이 없어, '여러 곳을 좀 더 둘러볼 걸' 하는 후회가 들곤 했다. 마음속 생각이 마치 마법의 주문이 된 걸까, 금년 초 다시 부산으로 발령이 나서 내려오게 되었다.

부산에 짐을 푼 지 두 달쯤 될 무렵 회사에서 멀지 않은 초량동 '이바구길'을 찾았다. 이바구길은 '이야기 길'이라는 의미의 사투리로 지하철 부산역 7번 출구에서 시작된다. 그 초입 골목 'Texas Street'라 적힌 아치형 간판이 생뚱맞다. 구 백제병원, 남선창고 터, 담장 갤러리, 동구 인물사 담장, 168계단과 모노레일, 이바구 공작소로 이어지는 길은 가파른 산기슭을 오르는 여정이다.

1922년 한국인이 설립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건물인 구 백제병원은 그 용도와 주인이 수없이 바뀌다가 지금은 카페가 들어서 있다. 창가에 앉아 탁자 위 무엇엔가 집중해 있는 오렌지색 뽀글뽀글 파머머리 아가씨, 친구와 수다를 떠는 여성, 남녀 커플 한 쌍, 그리고 청년 바리스타 3인, 벽돌과 흠집 난 창틀 그 자체가 고풍스러운 장식처럼 어울리는 낡고 오래된 이 공간을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좁은 비탈길 인물사 담장 거리로 들어서면 장기려, 박재혁, 유치환, 김민부, 나훈아 등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거쳐 간 과거와 현대 유명인의 약력과 사진이 대형 액자에 담겨 소개되고 있다. 가문 봄날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Mee too'의 파도에 휩쓸린 모 연극인의 액자는 서둘러 뜯겨 나갔는지 말끔히 청산되지 않은 구태처럼 흉스럽다.

담장 갤러리를 지나고 초량교회를 거쳐 계단 길을 오르다 보면, 고개를 쳐들어야 보이던 교회 높은 십자가가 이내 발아래로 낮아져 있다. 끝 간 데 없이 높이만 오르려는 우리 안의 이기와 욕심을 경계하라는 듯하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14:11>

골목길 빽빽한 집들 숲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도심에서 쫓겨난 많은 별들을 품었다. 가라앉을 듯 말 듯 초롱초롱한 저 오리온자리 별빛도 깊은 우주 밤바다를 수 백 광년 달려 지구에 닿았을 것이다. 별빛은 산복도로 아래위 비탈에 빼곡하게 들어선 마을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 마음을 닮은 듯하다.

가파른 168계단 난간에 붙여 놓은 팔랑개비는 살랑대는 바람에 쌩쌩 잘도 도는데, 어린 손자를 앞세우고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 발길은 무겁고 손에 든 보따리는 버거워 보인다. 168계단 중간쯤 담벼락 사잇길은 김민부 전망대로 인도한다. 1941년 옆 좌천동에서 태어난 천재 시인 김민부는 서른 초반에 요절했지만 불후의 가곡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전망대는 시가지와 부산항을 굽어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경사를 따라 층층이 주택들이 레고 조각들을 끼워 맞춰 조립해 놓은 듯 들어서 있다.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촘촘히 늘어서서 서로의 어깨와 등을 보듬으며 고달팠던 하루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앙공원을 좌측에 끼고 넓게 포장된 산복도로 '망양로'를 휘돌면, 스카이웨이 전망대와 유치환우체통이 차례로 맞이한다.

초저녁인데도 사람들 발길은 뜸하고 차량만 인도 옆 포장도로 위를 분주히 내달린다. 구봉산 자락 부산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복도로 한편에 빨간색 우체통이 자리한다. 경남여고 교장으로 재직했던 청마는 가끔 이곳에 올라 부산 바다와 푸른 밤하늘의 별을 보며 주옥같은 시상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중략>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행복, 유치환>


편지를 부치면 일 년 후 도착한다는 느린 우체통, 그 옆에 낯익은 그의 시 '행복'이 반갑다. 우체통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아 청춘 남녀 한 쌍이 소곤대는 얘기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저들도 청마처럼 '받느니 보다 더 행복한 주는 사랑'을 언약하고 있는 것일까?

불빛에 잠겨 암초인 듯 군락을 이룬 산동네 주택 너머 평온한 밤바다 위로 부산항대교가 선명하다. 색색 조명으로 황홀하게 빛나는 그 모습은 무지개처럼 눈 앞 가까이로 다가와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린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을 주기도 하고, 더군다나 돌아갈 보금자리도 있으니 우리는 저 가엽은 시시포스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 인생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로에 칠 년 전 가끔 찾던 초량 골목이 오랜 지기인 듯 살펴가라 밤 인사를 건넨다.


어둠이 내리는
초량동 골목 언덕배기엔
가야 할 까닭도 없지만
홀로 한 번 걸어 보고픈 길이 있다.

그 길 끝나는 곳엔
알 수 없는 때부터
알 수 없는 때까지
헤아릴 길 없이 오랜 그리움이 있어

초량 성당 십자가
해 그림자 길게 드리우면
人情에 목마른 사람들이
하나둘 지친 어깨 맞대고 찾아든다.

虛虛로운 언덕 위
가늠할 수 없이 먼 곳
가파른 그 길을 오르면
한결같이 두 팔 벌린 기다림이 있어
- <초량동 골목길> 장인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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