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골에서 하오재까지

성남 누비길 제6구간, 청계산길

by 꿈꾸는 시시포스

누비길, 하오재에서 옛골까지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 하오재에서 차에서 내려 국사봉 이수봉 매봉을 지나 옛골로 내려갈 예정이다. 청계 쪽에서 오른 산객들이 국사봉을 바라보는 능선 쉼터 길목 벤치에 모여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봉우리 아래 능선에 안겨있는 청계사에서 들려오는 목탁 독경 소리가 맑고 은은하다.

국사봉 이수봉 혈읍재 등 청계산과 그 주변에는 이색 조윤 변계량 등 여말선초 인물들과 정여창 김정희 등 조선시대 인물들의 자취가 스며있다. 망경대에서 혈읍재로 내려가는 길은 온통 얼어붙어 미끄럽다.

매봉을 지나고 가파른 능선 끝 온통 바위로 된 매바위에 올라서면 시야가 시원하다. 매바위 바로 밑 능선 참나무 가지 높이 까치가 집짓기 공사가 한창이다. 매 떠난 매바위는 까치에게 조차 위세를 잃은 듯.

소원을 들어준다는 돌문 바위를 한 번 통과해서 지나고 옛골 마을까지 한가로운 산길을 느긋하게 걸어서 내려왔다. 2018-02-18



누비길 일부, 청계산 원터에서 옛골까지


집을 나서는데 까치들이 왁자지껄 유별난 아침인사를 건넨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인다. 정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봄이 머지않은 주말을 맞아 청계산으로 향하는 길이다.

기온이 영하와 영상의 경계에 걸쳐 있어 살짝 쌀쌀한 공기가 상큼하게 느껴진다. 산행을 시작하면 땀이 배어 나와 걷기에 더없이 좋을 것이다. 이번 산행은 조금 특별하다. '평일 저녁 인천 주변 둘레길 탐방'이라는 콘셉트의 둘레길 탐방 동호회 '파로스'가 인천을 벗어나 주말 청계산 산행에 나선 것이다.

한 번쯤 기존의 틀이나 방식을 벗어나 보는 것은 마음 셀레는 일이다. 경계를 넘으면 또 다른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도 하니까. 동료들과는 달리 먹이 구하기에 목매지 않고 한계를 뛰어넘어 창공 높이 비상하고자 꿈꾸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새로운 세계를 보았던 것처럼.


산객들로 붐비는 전철 신분당선 청계산 입구 역 부근 원터골,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산행을 같이 할 동료들이 속속 모여든다. K회장, M 총무 등 파로스 임원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생수 간식 막걸리 등을 십시일반 각자의 배낭에 나눠 담는다.

원터골 산행 들머리 청계 계곡은 푸른 물 대신 얼음 위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봄을 알리듯 얼음 밑으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비발디의 <사계> 중 봄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봄이 왔네. 새들이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하네. 시냇물 살랑거리는 미풍에 상냥하고 중얼대는 소리 내면서 흘러가네."

저마다 가늠한 산행 코스와 날씨에 맞추어 등산복 배낭 등산화 스틱 머플러 장갑 등을 갖춘 모습에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다. 등산안내도 앞에 같이 모여 기념사진 포즈를 잡는 표정들이 봄날 햇살처럼 따사롭고 풋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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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파 전투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돌파하는 오호대장군 조자룡, 그 기세로 조금의 주저도 없이 앞으로 나서는 J 선배를 따라 매봉 쪽을 향해 산행을 시작했다. 금세 일행의 줄이 길게 장사진을 치듯 능선을 타고 오른다.

걷기 편한 육산인 청계의 등산로 곳곳은 눈이 녹아서 질펀하고, 따스한 햇볕이 부담스러운지 동료들은 하나둘 재킷 속 두터운 패딩을 벗어서 손에 들거나 배낭에 넣는다. 들머리에서 1.7km 남짓 거리의 원터골 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턱밑으로 차오르는 숨을 돌렸다.

회사 체육대회 달리기 대표 N 양이 경사진 능선길에서 힘겨워하며 주저앉기 직전이다. 평지에서 날고뛰던 기량은 어디로 갔는지 의아하다. 그 누군들 자신에게 익숙하던 상황이나 환경이 바뀌거나 변하면 대처하기 난감하기 마련이다.

평소 재치 있는 말솜씨가 남다르다는 K는 선두 그룹에 서서 숨이 차오르는 산행 중에도 얘기를 그치지 않고 동행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欲訥於言而敏於行'이라는 말씀처럼 행동도 말처럼 민첩해 보인다.

매바위로 오르는 길에 뒤돌아보면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살랑대는 바람은 땀이 배어 나온 이마에 시원하게 와 닿는다.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걷는 산행은 이것저것 볼거리나 산에 얽힌 얘기를 놓치기 십상이고 때론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도 한다.

이정표를 보며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가늠하고, 뒤돌아 서서 산 아래 경치도 조망해 보고, 안내판을 읽으며 지명에 얽힌 전설에도 귀 기울여 본다면,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 여기던 산이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누는 친구로 다가올 터이다.


청계산에는 국사봉 이수봉 망경대 혈읍재 등 조선조 사림들과 려말 선초 절개를 지킨 선비들의 얘기가 깃든 지명이 많다. 눈과 귀를 열고 걷는다면 그야말로 역사책 속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바위 아래 평평한 능선에 있는 '돌문 바위'는 눌러앉은 바위에 다른 바위가 기대어 서서 그 사이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다. 많은 산객들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 돌문 바위를 세 번 도는 수고를 아낄 까닭이 없다.

돌문 바위를 지나면 82년 6월 공수낙하 훈련 중 수송기 추락으로 순직한 장병 53인을 기리는 충혼비가 있다. 무거운 마음으로 충혼비 방향을 비껴 매바위로 향한다.

사람마다 각자 여러 고비가 있겠지만 매바위에 올라서면 오늘 산행의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긴 셈이다. 우뚝한 바위능선 위 전망이 툭 터인 매바위에 올라서니, 매서운 눈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의 매 한 마리가 어디선가 금세라도 날아올 것만 같다.

산객들이 너른 나무데크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는 매봉을 지나고 석기봉 쪽으로 소나무가 늘어선 길로 접어들었다. 아무 말 없이 싫은 기색도 없이 항상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서 지나는 산객을 맞아주는 푸른 솔, 솔 숲을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만경봉을 좌로 휘돌아 그 아래에 안긴 아늑하고 너른 공터에 자리를 잡고 앉은 동료들과 합류했다. 매트 위에 편육 김치 막걸리 등을 펼쳐 놓고 얘기꽃을 피웠다. 산행은 경계를 넘어 야유회의 지경으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애초 경계는 불필요하고 장벽은 허물어 버려야 할 제약 인지도 모른다.

무르익어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보따리를 아쉬운 마음으로 수습해서 다시 챙기고 이수봉으로 향했다. 유학자 정여창 선생이 무오사화를 피해 이 산에서 생명의 위기를 두 번 넘겼다는 이수봉(二壽峰), 그 표지석을 배경으로 일행이 단체사진을 한 장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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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봉을 뒤로하고 이제 옛골 쪽으로의 하산길이다. 멀리 오른쪽으로 숨길 수 없는 기품을 드러낸 관악산이 인사를 건넨다. 온갖 번거로움을 벗어던지고 단출한 모습으로 겨울을 견뎌낸 나무들은 아직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눈이 녹고 날이 온전히 풀리면 메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저마다 초록색 잎을 발랄하게 틔워낼 것이다.

어둔골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겨울에 작별을 고하며 봄을 부르고 있다. 계곡 옆 너른 둔턱에서는 반백 머리의 모 고교 동창 산우들이 시산제를 준비하고 있다. 그 모습이 너른 광장에 모여들어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비둘기 떼처럼 보기에 좋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산행을 끝낸 일행들이 '옛골토성'에 모였다. 그 예스러운 토성은 누구의 힘도 미칠 수 없는 성역 '소도'가 된 듯했고, 일행 모두가 오래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마음을 나누는 모습이다.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듯.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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