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부재인가, 아니면 존재의 드러냄일까
‘존재’란 무엇일까요?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 왜 존재하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죽음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누군가의 부재가 이렇게 공허할 수도 있을까?”
이런 생각은 대부분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곤 합니다.
그런데 문득, 자연을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던져본 적 있나요?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만개한 꽃이 계절의 흐름 속에서 시들어 사라지는 과정 —
그 생멸(生滅)의 순환 속에서도 존재의 흔적은 남습니다.
단지 ‘바로 그때 그 꽃’이 아닐 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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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b.1950)는 이 질문을 조각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그의 조각은 생명력이 없는 정적인 형상이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인간의 껍데기처럼 ‘존재의 부재’를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본떠 조각을 제작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몸은 자아가 아니라, 그릇이다.”1)
곰리에게 몸은 의식의 통로이자 동시에 비워진 공간입니다.
그의 조각은 ‘나’라는 자아의 흔적이 지워진 채, 순수한 존재로 환원된 형상이지요.
그는 인간의 몸을 통해 생과 사,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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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뮤지엄 산에서 진행 중인 그의 전시는 이러한 사유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안도 타다오(Ando Tadao, b.1941)의 건축은 ‘침묵’과 ‘여백’을 품고 있고, 그 속에 놓인 곰리의 조각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서 있습니다. 높은 천고와 열린 벽면 사이, 빛과 그림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감상자는 조각과 마주하며 묵묵히 가라앉습니다.
그곳에서의 30분은 길게 느껴지지만, 어느새 시간의 흐름이 사라진 듯한 감각에 잠기게 됩니다.
정적인 조각, 정적인 공간,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침묵 속에서 감상자는 자신이 ‘존재하는 존재’임을 다시 자각하게 되지요.
조각은 움직이지 않지만,
감상자의 몸이 그 앞에서 머무르고 숨 쉬며 그 형태를 따라 할 때,
그 정적인 형상은 잠시 생명력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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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과정은 무엇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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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엔 곰리의 조각들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조각은 시간의 정지를 담은 예술입니다.
그 속에는 이미 죽음의 은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곰리의 조각은 단순히 ‘멈춘 생명’이 아니라, 비워진 공간 속에서 다시금 존재를 묻는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침묵은 그 질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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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존재하고 있나요?
Death lingers — not as loss, but as the quiet shape of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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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hite Cube 갤러리 작가 노트
-하나의 전시가,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질문을 다시 일깨웠습니다. 그 순간의 생각을 담아, 조용히 풀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