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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May 06. 2021

나팔수의 평일

섬강의 시끄러운 두 시간

일을 그만두니 쉬는 날과 쉬지 않은 날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하루하루 어떻게 놀아야 잘 놀았다는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집순이 기질이 강하다 보니 밖에 나가는 보다 아직까진 집 안에 있는 게 더 좋다. 이걸 깨주는 게 임시로 같이 살고 있는 동생이다.

지난달부터 차량을 렌트해서 정선, 평창, 홍천 구석구석을 다녔다. 봄 꽃을 보고 남새를 맡고, 얼음장 같은 물에 발을 담그며 마음을 환기시켰다. 그러다 지난주에 집에서 잠시 해리(자동차 포터)를 빌려왔다. 반납의 날짜는 다가오고 반납하기 전에 어디든 놀러 다니자고 해서 가까운 동네를 돌아다녔다. 오늘의 장소는 섬강이었다.


우리는 나이 차이는 좀 있다. 부모님이 같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중학생 때 관악부를 했다. 나는 트럼펫, 동생은 튜바였다. 전공을 고민하고 제안받고 꿈꿨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동생은 확실히 있다. 악기가 아니더라도 음악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녀석이다. 음악과는 전혀 다른 전공이었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합주가 하고 싶어서 학내 윈드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동생은 섬강 어드메쯤 악기를 불만한 곳을 찾아봐 뒀다면서 의자 중고거래를 핑계로 나는 데리고 나갔다. 간만에 악기를 불 수 있으니 귀찮은 척, 못 이기는 척 얼른 따라나섰다.




적당히 바람이 불었다. 해가 질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가 산에 가려져서 시원하고 분위기마저 좋았다. 의자도 뭣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아서 가지고 있던 수건을 깔고 앉았다. 동생은 잼베를 들고 나는 트럼펫을 들었다. 입술을 풀고 손가락을 풀었다. 아, 이런 느낌이었지.

고음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저음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아직까지 대회곡의 하이라이트를 잊지 않았을까, 역시 가장 기본은 '국기에 대한 경례'지 하면서 연주를 시작했다. 둘 다 지브리 덕후라서 '지브리 우쿨렐레 악보'를 펴 놓고 그냥 연주했다. 합주를 하는 것이 아니니 음정 박자에 구애받지 않고, 연주하고 싶은 데까지만 연주했다. 트럼펫은 멜로디 악기라서 멜로디를 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합주가 하고 싶었다.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듣고 지휘자를 바라보며 함께 연주하고 싶었다.


우리가 자리 잡고 연주하던 곳은 오리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왜가리도 있고, 풀벌레도 있었다. 그리고 메아리가 있었다. 너무 시끄럽게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혹시 동물들한테 소음이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미안하지만 살짝 양해를 구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수면에 물고기가 튀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슈베르트 숭어를 연주했다. 아 악보가 없으니 연주가 엉망이다.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은 없다.


지브리 OST, 영화 OST, 민요, 트로트, 연주곡, 교가 등등 한 시간 반쯤 불자 입술이 풀려버렸다. 고음이 잘 안 나오기 시작하고, 음이 깔끔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릴 때였지만 그때는 어떻게 입술도 안 풀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과거의 내가 신기했다. 뭐, 20년 전의 중학생일 때, 10년 전의 대학생 때의 입술은 젊었으니 그걸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동생에게 트럼펫을 넘겨주고, 젬베를 넘겨받았다. 젬베를 칠 줄도 모르면서 두드렸다. 신난다. 둥둥둥, 통통통, 팅팅팅... 나는 리듬감도 없다.


몰랐는데 그 길목은 유명한 산책길이었나 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고 한다. 트럼펫을 불면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었던 것이다. 잘했다. 아마 뒤에 누가 다니는 걸 알았다면 창피해서 개미 소리로 악기를 불었을 것 같다. 아무 눈치를 보지 않고 악기를 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백수 나팔수가 평일에 섬강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연주자는 연주를 했지만 듣는 사람과 동물에게는 소음이었을 수 있었으니 시끄러운 섬강이었을 것이다. 이제 곧 차가 없을 예정이라 언제 또 그곳을 갈 수 있을지 언제 또 이런 연주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다음에는 휴일에 정말로 '나팔수의 휴일'을 불어봐야겠다. 좋아하는 것을 다시 하는 것은 늘 설레는 일이다. 입술의 떨리던 느낌이, 손의 울림이 며칠은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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