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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May 12. 2021

읽지 않아도 맘에 안 드는 글

샘플 3-35

샘플3이 서울에 일을 보러 갔다.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먹었고, 뭔가 정보를 얻어냈다. 그 정보는 내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것이었고, 다음날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는 그 대응을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내가 다음날 외부로 교육과 워크숍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교육은 금요일이었고, 그 다음 주부터는 휴가였다. 그래서 샘플3은 "내일부터 휴가지만..."이라는 말을 계속 해댔다. 내일은 휴가가 아니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고 싶을 정도였다(참조: 출장과 휴가, brunch.co.kr/@laputa2018/36).

솔직한 마음으로는 다음날 있을 교육보다는 이틀 뒤에 있을 졸업시험이 더 신경 쓰였다. 이번에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이 또 뒤로 미뤄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일을 놓고 싶지 않았다.


"니가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주면 할까? 안 할까? 나를 저주할까?"


졸업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면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치고 일을 하려고 맘을 먹었다. 그런데 샘플3이 던진 말에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 했다.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었고, 심지어 알게 된 내용이 개판 오 분 전이었기 때문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졸업이 대수랴.


"줘도 열심히 하진 못하겠지만 우선 하긴 할 거예요. 저주를 하더라도 일은 할 겁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괜히 탓하게 될까 봐 'ㅋㅋㅋㅋㅋㅋ'를 잔뜩 붙여가면서 졸업 늦어라 늦어라 하네요 라고 했더니 샘플3은 기분이 상한 듯 "그러니까 쉬어."라고 했다. 그가 기분이 상할 타이밍이 맞는 건지 갸웃했다. 쉬는 게 아니라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수백 번 이야기를 하면 뭐하나, 이미 뇌 속에 쉬는 거라고 딱 박혀서 들을 생각도 안 하는 고집은 덤이었다.


우선 시험공부를 내려놨다. 해당 내용을 보면서 문제 되는 점을 실시간 톡으로 보냈다. 말을 정리해서 보낸 것은 아니었다. 우선 즉각 드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함축된 보도자료가 아닌 보고서를 보면서 한 이야기였다. 샘플3이 본 것과는 더 폭넓은 자료였다. 그리고 그 내용의 중요한 부분은 지자체의 문제가 80% 이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었고, 실시간 대응은 다시 생각해도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었다.


샘플3이 주문했다. '기조는 강력하게 내용은 충실하게'라고. 동의했다. 숙고를 하자는 얘기도 했지만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좋을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휘갈겨 쓰더라도 아침까지 준다고 했다. 수정은 그에게 맡겼다. 대신 샘플3의 언어로 너무 바꾸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너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싫다고 대답했다. 수정을 안 해준다는 것인지 바꾸지 않겠다는 것인지 참 모호한 대답이었다.


잠시 뒤 전화가 왔다. 늦은 밤이었다. 늦은 밤에 개별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특히 전화를 하지 않겠다던 샘플3의 약속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처음 대화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서로 생각하고 있는 기조를 나눴고, 동의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네가 쓴 글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 휴가 다녀와서 하자" 스스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얼굴을 보고 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안된다."는 소리도 지껄였다. 대체 얼굴을 이 급한 상황에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얘기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급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결국 사무실에 나오라는 얘기일까? 멀리 교육을 가야 하는데?

분명 사안이 급한 것인데 휴가 끝나고 하자는 얘기는 1주일 이상 묵히자는 얘기다. 그럼 애초에 나에게 이 말을 꺼내지 말지 대체 왜 꺼낸 것인지도 이해가 안 됐다. 신경 곤두세우면서 마음 불편하게 휴가를 보내라는 의미였을까? 이럴 거라면 대체 왜 나한테 이 얘길 꺼낸 걸까?


그러고는 샘플3은 "네가 쓴 글은 결국 조정해야 하니 다녀와서 하는 것이 맞겠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참 우스운 것은 샘플3은 아직 내가 쓴 글을 한 줄 아니, 한 단어도 아니, 한 글자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내용을 받고, 확인하고, 톡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면 안 되는 것인지, 꼭 한 자리에 앉아서만 할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덧붙여 샘플3이 출장 갔을 때 샘플3의 글도 톡으로 논의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쉬고 있는데...'였다. 환멸이 났다. 다음날은 휴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 교육은 조직이 그 해에 '주요 사업'으로 정한 일 중에 하나였다.

심지어 그 주요 사업은 샘플3이 나에게 계속 팩트를 요구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교육을 들어야겠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놀러간다라니 나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런 류의 말도 안 되는 논쟁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다가는 또 딴소리를 할 것 같아서 녹음한다고 했더니 이제는 입을 다물었다.


"나 말 안 해."


5살 먹은 꼬맹이도 이렇게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더니 바로 "그래, 니가 맞아."라며 또 대화를 중단시켰다. 일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웃긴 것은 이 대화의 답답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더 강력한 것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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