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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토로 May 16. 2021

보드게임방 마지막 직원

대학교 1학년 때 보드게임방 알바를 했다. 그 지역의 마지막 보드게임방이었다. 그 뒤로 약 2년 정도는 새로운 보드게임방이 생기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다른 보드게임방도 생기고 만화방에 보드게임이 비치되어 있다.


그 보드게임방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사장님의 높은 덕력으로 수백여 가지가 넘는 보드게임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의 시급이랑 비교하면 1/3도 되지 않는 시급이었다. 게임을 많이 외우면 시급을 올려주신 다길래, 300원 정도 더 받기 위해 100가지가 훨씬 넘는 보드게임을 룰을 다 외웠다. 여러 가지 의미로 게임을 좋아해서 어렵지는 않았다.

보드게임 특성상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게임이 많았어서 한가할 때는 손님들과 게임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으로 유명한 '카탄'을 하던 외국인 손님들이 마감시간을 넘겼다. 그 손님들은 마감 시간이 되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마감을 치고, 그 손님들과 함께 게임을 했다. 마감을 했으니 이용요금은 무료였다. 사장님은 알바생들이 손님들과 마감시간 이후에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으셨다. 영어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한글은 서툴렀지만 카탄으로 대동단결이 된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특이한 알바이다 보니 알바생들끼리 유대감이 굉장히 높았다. 알바생 중 한 명이 군대를 하게 되어서 알바를 그만두는 날에는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밤새 보드게임을 하면서 건전하게 놀기도 했다.


보드게임방은 음료도 함께 팔았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얼음을 얼리는 일이었다. 어느 날은 사장님이 얼음이 나오는 정수기를 사주셨다. 하지만 흥분 수치가 높은 보드게임방에서 소비되는 얼음을 정수기가 감당 할리 없었다. 새로운 문물은 과거의 방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운 음료수를 주문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따뜻한 밀키스'를 주문했다.

"네? 따뜻한 밀키스가 맞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렇다고 하셨다. 그 손님은 진지하셨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데워서 가져다가 드리니 만족해하셨다. 정말 궁금해서 너무너무 궁금해서 나도 데워먹어 보았다. 세상에... 맛있었다. 그 뒤로도 오신 그 손님은 늘 따뜻한 밀키스를 주문하셨다.


보드게임방 알바를 하면서 정말 신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알바 6개월 즈음 사장님이 바뀌었다. 다른 업종을 하시기 위해 가게를 인수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여자 친구분이 보드게임을 좋아하시기도 했고, 본인도 그 보드게임방을 운영하고 싶으시다면서 몇 개월 더 운영하셨다. 그러는 중 함께 일하던 알바생들은 나만 남고 군대를 가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면서 모두 그만두고 나만 남았다. 새로 들어오는 알바생들은 게임을 익힐 생각이 없었다. 맨날 설명하기 쉬운 게임, 짧은 시간에 끝나는 게임만 추천했고, 보드게임을 잘 아는 손님이 해당 게임이 있냐고 물어보면 있는데도 없다고 대답했다.

손님은 점점 줄었다. 있는 손님들의 테이블에서도 할리갈리 종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었고, 연구실에 들어가기로 한 나도 알바를 그만두었다. 내가 그만두고 얼마 뒤 가게는 문을 닫았고, 결국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다. 나는 100개 넘는 게임을 습득하고 있던 마지막 알바생이 되었다.


카드게임들은 망가지지 말라고 손수 코팅을 했다. 망가지면 잘 벗겨서 또 코팅을 하고, 없어진 게임 부속들은 만들기도 했다. 먼치킨 같은 것은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된 것이 없어서 사장님이 외국에서 사다가 번역해서 카드 문구를 적고 손수 코팅을 했다. 그때는 없었지만 지금은 한글로 번역되어 발매되는 게임도 있고, 여전히 구매할 수 조차 없는 게임도 있다. 그렇게 빨리 폐업하실 줄 알았으면 정들었던 게임들은 몇 개 사놓을 걸 그랬다.


유퀴즈에서 부루마블 40주년으로 사장님이 나오신 걸 보니, 보드게임방 알바할 때가 꽤 많이 생각난다. 다른 업종으로 바뀌고 나서 가끔 사장님은 뵈러 갔다. 그렇게 신나게 같이 놀던 알바생들과는 점점 연락이 뜸해졌고, 지금은 연락을 안 된다. 다들 잘 지내겠지?

이제는 그때처럼 순수하지 않다. 하지만 보드게임을 할 때만은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다.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이래저래 모으다 보니 그래도 꽤 있다. 문제는 같이 할 수 있을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도 오늘은 같이 해 줄 동생놈도 있으니 예전 생각하면서 부루마블 한 판 하고 자야겠다.

추억의 부루마블, 시선강탈 도오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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