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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Feb 26. 2020

02 고유성과 창조성을 잃어버리게 된 시간들

프롤로그

 

 우리가 아이였을 때를 떠올려 보자. 그림을 그리라고 시키지 않아도 펜을 쥐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고, 온갖 재밌는 공상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은 창조성 그 자체이다. 제한 없이 창조성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즐겁게 그린 그림에 ‘뭘 그린 건지 알 수가 없네’라는 평가로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서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를 차단하게 되었다. 마냥 신이 나서 부르던 노래에 ‘그게 노래냐’는 핀잔은 다시 노래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했다. 아이의 자유로운 창조적 표현들은 창조성이 막힌 어른들에 의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재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평가받게 되었고, 수치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점점 창조적 표현을 숨기게 되었다. 


 어른들의 평가는 창조적인 욕구만 억누르게 된 것이 아니다. 자라면서 수치심을 느꼈던 말들은 내면화되어 스스로를 바라보는 잣대가 되었다. 어릴 적 들었던 부정적 평가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와도 ‘내가 잘할 리가 없어. 괜히 나섰다가 또 비웃음만 사게 될 거야...’하는 두려움으로 시도할 용기조차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으려면 실패하지 않으면 된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일만 하면 된다. 이제 더 이상 재밌을 것 같은, 또는 그냥 한번 해보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는 무시하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안전한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한편, 상처로 인해 위축된 자아는 존재감을 얻기 위한 인정이 필요하다. 인정을 받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줄 만한 일을 성취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창조성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런저런 욕구들을 따라갈 때 삶에서 여러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욕구에 맞추어 그들이 원하는 내가 되려 할수록, 내 안의 욕구들은 억누르거나 무시되고, 자신의 욕구를 잃어버릴수록 창조성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원해서 나도 원하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창조성은 선택으로부터 출발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선택을 하며 끊임없이 삶이 창조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경험한 교육시스템은 우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 보기보다는 ‘교육받아야 할 대상’으로 대했고, 교육과정에서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탐색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스스로 탐색하고 선택할 때 누리는 즐거움과 열정은 사라지고, 해야만 하는 의무에 갇힌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위대했던 꿈과 열망을 포기하는 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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