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성격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미덕이 아니다.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마냥 퍼주다가 혼자 서운해서 상처받고, 남에게 필요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 돕지 않고 있으면 미안한 마음에 시달리는게 일상이다.
건강한 이타심은 아무에게나 에너지를 퍼주고 털리는 자기희생의 호구패턴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이 보여도 상대가 요청하지 않는 것을 주지 않는 성숙한 사랑이거늘, 나는 매순간 그러지 못하는 나의 이타주의의 그림자를 자각하며 불에 데인 듯 아파해야 했다. (위로가 되는 건 남편도 그런 사람이라, 둘 다 사람들에게 마구 퍼주다가 공허해지는 서로를 깊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치유와 성장을 돕는 내내 나의 미숙한 이타심의 그림자를 뼛속까지 경험했다. 마이 아팠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경험은 무언가 성취해서 느끼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이다. 동시에 한 끝 차이로 매우 경계해야 하는 '이타주의의 그림자'이다.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려 수년을 애쓰다가 작년에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운영하던 공간을 정리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지친 마음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집에 처박혀 있는 동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나는 아무도 돕지 않는다. 세상에 내가 도와야 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답이 있다. '
그런데 오늘 아침, 은혜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울컥 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진정으로 누가 누구를 돕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란 게 있을 수 있을까? ... 아마도 "당신은 할 수 있어. 당신은 할 수 있어"를 외치다가 응원이 필요했던 내 마음에도 그 소리가 와 닿아 결국 우리가 함께 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
- 치유적이고 창조적인 순간,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10년간 사람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새 또 까먹었다. 내가 무언가 더 알고 있어서 그들에게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게 아니라는 것도 또 놓치고 있었다.
나로 인해 내가 만난 사람들이 성장한 만큼, 그 사람들로 인해 내가 성장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의 숨겨진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된 만큼, 사람들로 인해 내 깊은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할 기회를 얻었다. 나로 인해 살아날 수 있었다고 깊은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들 덕에, 나도 견딜 수 없이 힘든 순간들을 지나올 힘을 얻었다.
모든 순간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함께 뛰고' 있었다. 모든 순간이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서로를 살리는 '상생'이었다. 퍼주다가 지치기만 했다는 왜곡된 기억의 '진실'이 드러나며 가슴이 한껏 뻐근하게 충만해진다.
기억하고 싶어 오늘 글을 썼지만, 나는 살다가 또 순간 순간 까먹고 '상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미 온전하다는 걸,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없다는 걸 놓칠 것이다.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 또 가슴에 꼭꼭 눌러담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