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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조성 강사 라라 Feb 19. 2023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가?


1.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한참 예민하던 중학생 때.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1년 넘게 돌고 돌아 친한 친구에게 들은 적이 었었다.

친구의 말은 '소문 듣고 너 싫어했었는데, 친해져 보니 좋은 앤것 같다'라는 (어찌 보면) 고마운 고백이었는데,

이미 1년 넘게 퍼져있던 내 소문의 실체를 듣고는 심하게 충격을 받았었다.



2.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런 일은 몇 번 더 있었고, 제일 친한 친구가 나를 왕따시킨 사건까지 합쳐지면서.

사회생활 내내 사람들이 내 뒷이야기를 수근거릴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었다.

그래서 책잡히지 않으려고 늘 과도하게 눈치를 살폈고,

무조건 착하게 무조건 싹싹하게 굴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었다.



3.30대에 한 단체에 일하러 갔다가 또 한번의 사건을 겪었다.

그 단체에 친분이 있던 분이 어느날 나를 따로 부르더니 '내가 너를 성추행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이야기 들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계속 말했지만, 그 분은 이미 (내가 한 적도 없는 말)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보신 듯 했고, 오해를 풀기보다는 상황을 수습하려고 사과하기 바빴다.

이후로도 계속 내 눈치를 보는 그 분 때문에 일하는 내내 가시 방석이었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어떤 소문이 어디까지 돌고 있는걸까?'

'나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도 다 내 뒷이야기를 듣고 나를 나쁘게 보고 있지 않을까?'

무서웠다.

사람들과 눈마주치는 것조차 무서워서 (왠지 내가 죄인같고 뭘 잘못한 것 같아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새로운 사람들과 일할 때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안좋게 생각할까봐 지레 겁먹고 위축되곤 했다.



4. 30대 중반, 인생의 각종 트라우마를 치유하면서 많은 부분이 해결됐지만, '억울함'이라는 주제는 계속됐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고, 오해가 사실이라고 믿고, 나에게 비난의 말을 쏟아붓는 상황을 매년 겪어야 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꽤 친밀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던 사람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크게 마음 앓이를 했다.


그럴 때마다 '가시돋친 비난의 말'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오해를 풀지 못하는 억울함'이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고, 오해가 그들에게는 '사실'이었다.



5. 오해로 인해 겪은 고통이 절절했기에, 그 누구에게도 나와 같은 억울함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하게 어떤 상황인지 파악될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

'무엇이 사실인지 양쪽 이야기를 다 듣기 전에는 판단하지 않는 것',

'사실 확인을 위해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주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6. 생각이 감정을 만든다.

나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판단은 나에 대한 분노, 원망, 의심 등의 감정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됐더라면 느낄 필요도 없는 불편한 감정들을 말이다.



7. 그러니 누군가에게 분노와 비난의 말을 하기 전에.

제발 딱 3초만 멈추고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판단)이 정말로 사실인가?'



8. '우리가 믿고 있는 95%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이 아닌 '믿음' 때문에 고통받는다.'

돈 미겔 루이스의 말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의심하는 것도, 오해로 인해 분노하고 상처받는 것도 '고통'이다.

비난의 말을 들은 사람 뿐 아니라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사람 또한 (본인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상당히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을 목격하는 제3자도 고통스럽다.



9. 어차피 사는 데는 일정량의 고통이 따른다. 성장을 위한 장치라 어쩔 수 없다.

내 인생에 주어진 고통을 처리해서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기도 바쁜데,

제발. 안겪어도 되는 고통까지 스스로 양산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10. 끝으로 창조와 모방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오늘 1~10까지 숫자를 붙인 것은 경영 멘토 신수정님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 방식을 모방했다고 해서 내 글이 신수정님의 수려한 통찰력을 담지는 않는다.


모방과 창조는 언제나 논란이 되어왔지만, 모방은 분명히 '창조의 어머니'다. 모방 없이는 창조도 없다.

모방을 창조로 승화하는 방법은 '얼마나 원본과 멀어졌느냐'이고, 그러기 위해선 창조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본질은 이것이다.

모방을 베이스로 했어도 '창조적인 것'에는 자신의 독창성이 담겨 있고,

'독창성'이란 늘 진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즉, 결과물을 두고 '모방'이냐 '창조냐' 논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사자가 이미 자신의 행위가 모방인지 창조인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들 앞에서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일개 유튜버로서 현재 시끌시끌한 '표절' 논란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봤다.

앞으로 얼마든지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나는 주언규씨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주언규씨를 보호하고 응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기연님의 글

https://blog.naver.com/isangcouple/22301976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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