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다리 뒤.
[space story] 05. 고시원
난 여자의 미끈한 다리를 보면 흥분을 느낀다.
새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칠한 입술도 아니고, 터질 듯한 가슴도 아니며, 실룩이며 움직이는 엉덩이도 아니다. 오로지 내 본능적인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은, 타이트한 미니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여자의 ‘다리’일 뿐이다.
그래서 잡지나 TV 광고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스타킹 광고다. 카메라 앵글을 로우로 잡아 밑에서 위로 길게 클로즈 업 된 여자의 다리를 볼 때마다 내 물건은 대책 없이 솟구쳐 버린다.
신경숙은 영감이 떠오를 때 어느 장소에 있든지 집으로 향한다고 했지만, 나는 욕망을 느낄 때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서둘러 1평 남짓한 고시원의 이 작은 방으로 돌아온다.
소설가는 글을 쓰기 위해 돌아간다지만, 나는 자위를 하기 위해서 일 뿐이다.
내 방의 천장과 벽에는 온통 여자의 다리 사진이 붙여져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온갖 변태적인 행위를 상상하며 묘한 신음을 토해낸다.
어느 때는 여자의 다리를 뜯어먹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붉은 피가 난자한 다리를 잡은 채 내 이빨이 여자의 다리에 박히는 순간 오르가즘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언제나 심한 허탈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손때가 묻어 이미 낡아 버린 민법 책과 헌법 책뿐이었다. 난 이미 9년 동안 저 지겨운 책들과 씨름을 해왔다. 소름 돋도록 지겨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미 내 법학과 동기들은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더 약삭빠른 놈들은 변호사 개업을 한 놈들도 있다. 그 놈들을 만날 때마다 동정과 조롱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과 수석이라는 내 타이틀이 무참하게 짓 밟혀지면서도 내가 ‘그 새끼’ 들을 만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놈들이 나를 미끈한 다리를 가진 여자들이 있는 술집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가끔 통 큰 놈들이 술을 사줄 때면, 술을 진탕 마시고도 9년 동안 고시원에 처박힌 나를 위로한답시고 2차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밤새 여자의 다리만 핥다가 나온다. 여자들이 나를 변태 취급을 하는 것도 다 이해한다. 마치 발정 난 숫캐처럼 여자의 다리에 내 물건을 비비며 사정을 하곤 했으니까.
훗…… 씁쓸하다.
혼자 침대에 누워 여자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자는 내 정액이 묻은 다리를 몇 번이나 씻으며 변태새끼라고 욕을 했다. 그 투덜거리는 소리가 소란한 소음으로 내 귀에 박혀올 때마다 내가 왜 사법고시를 포기하지 못 할까를 생각해보곤 했다.
왤까. 어째서 그 지겨운 법학 책을 불살라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제 더 이상 내가 법관이 될 수 있는 희망 따위는 없는데.
오늘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민법 책 195P 34째 줄에 오타가 난 것까지 외워버린 나로서는 더 이상의 공부가 무의미했다. 그러나 시험 결과만 나오면 내 이름은 늘 빠져 있다.
이유가 뭔지 나 자신도 모른다. 시험지에 여자 다리를 그리고 나오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낙방이었다.
이제는 지겹다. 지겹고, 지겹고 지겨워서 죽어버리고만 싶다.
바퀴벌레가 우글대는 고시원도 지겹고, 학부시절까지 합쳐 13년 동안 먹어온 순대볶음 냄새만 맡아도 역겨움이 올라온다.
오로지 이런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여자의 다리뿐이다. 매혹적인 다리를 가진 여자를 볼 때만큼은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 극치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행복감은 순간이어서, 언제나 나를 다시금 절망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내 인생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패배의 연속이었음을 재확인 시켜 줄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늘 여자의 다리에 매달렸다.
처음부터 내가 지금 같은 변태는 아니었다. 다리가 멋진 여자를 유난히 좋아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구제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학부 3학년 때 만났던 내 첫 여자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전도유망한 법학도에게 소개팅이 쏟아지던 그 시절, 나는 그녀를 만났다. 다리모델을 할 만큼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했던 그녀와 나는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언약식을 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전도유망한 청년이 구제불능의 낙방생으로 변할 시점, 그녀는 내 앞에서 그 고고한 다리를 꼬고 앉아 ‘헤어지자.’고 말했었다.
그 순간 내 귀에는 그녀의 이별 선언이 들리지 않았다. 투명 유리 테이블 아래로 보이던 그녀의 다리만이 오직 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어디에 부딪혔는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는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빛이 눈앞에 어른어른 대자 내 몸은 아릿한 흥분 속에 휘감겼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 가버리고 나서도 나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면바지를 입은 나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발기된 내 페니스가 다시 가라앉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나는 울었던 것 같다.
조금 더 기다려 주지 않은 그녀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 때 나는 너무도 심하게 지쳐 있었다. 더 이상 삶이 나에게 희망의 손을 건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다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나는 지쳐 있다.
보고 있던 민법 책을 덮어 버렸다. 가슴이 답답하다. 당구장이라도 갈 생각에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 속에 빛바랜 퀭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울컥 올라오는 경멸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눈을 짓이겨 놓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길로 나는 고시원 총무에게 가서 송곳을 빌려 왔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손에 들려 있는 송곳 끝에서 날카로운 푸른 빛이 도는 것 같았다.
헤어진 그녀의 허벅지에 어른거리던 그 색깔이다. 거울 속의 퀭한 눈동자 앞에는 뾰족한 송곳날이 금방이라도 찌를 듯이 들려져 있다.
나는 거울 속의 놈에게 조소를 보냈다. 그러자 거울 속의 놈은 송곳이 두렵지도 않은지 나를 보며 더한 비웃음을 보내왔다.
개새끼. 이래도 웃나 보자!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송곳을 치켜 올렸을 때,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붙여 놓았던 여자의 다리가 인쇄된 대형 포스터였다. 스카치테이프의 접착력이 다 되었는지 포스터는 그대로 바닥으로 낙하했다.
송곳을 든 채 그대로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내 시선이 벽을 향했다. 여자의 다리가 붙어 있던 뒤는, 니코틴에 빛이 바래지 않은 채 깨끗한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쓰여 있는 몇 줄의 글씨.
“법 자체에는 눈물이 없다. 그러나 법을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다. 나는 법 앞에서 불평등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싸울 수 있는 법관이 될 것이다.”
…….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옛날,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법을 공부하던 그 해맑던 시절, 이 고시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내가 썼던 글귀였다.
나는 가만히 송곳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눈물이 흘러나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 그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민법 책을 펼쳐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울 수 있는 두 눈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