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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Jun 27. 2019

기생일기

[space story]  06.  요정

- 단기 4333年 5月 1日, 土.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우리 요정(料亭) ‘梅花’ 는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축하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상에 천만 원이 넘는 호사스러운 상이 하루에도 서 너 번씩 차려졌고, 그 대부분의 음식은 쓰레기봉투에 담겨져 나가기 일쑤였다.


우리 梅花는 인사동 안쪽에 은밀히 운영되는 요정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고풍스런 멋을 내는 술집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곳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가 없다. 철저하게 멤버 쉽으로 운영되는 우리 요정 손님은 정계와 재계의 하이클래스만이 회원으로 되어 있다.


해서 이곳에서 일하는 나 같은 기생들의 프라이드는 대단하다. 아무나 기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듯.


오늘은 특히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 그는 4선 국회의원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에 유력한 후보가 되는 사람이다. 만약 뜻대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나는 대통령의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 단기 4333年 5月 5日, 金, 어린이날.     


TV 뉴스에 그가 한 지방도시 어린이 행사에 참여한 것이 비쳐졌다.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를 안은 채 그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화면에 나오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이 새어 나왔다.


사실 내 가장 큰 소망은 대통령의 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은 평생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20년을 동거 동락한 아내가 있고, 세 명의 자녀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스캔들에 연루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평생 그의 그림자로 살아야 한다. 만약 나와 그의 관계가 세상에 회자된다면, 나는 그의 명예를 위해서 목을 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클린턴의 여자 르윈스키를 경멸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르윈스키는 기생이 아니라, 한낱 여자에 불과했기에.


기생은 여자와 다르다. 기생은 여자이기에 앞서 기생(妓生)이어야 한다. 모시는 분을 위해서라면 기생은 여자이길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 단기 4333년 5月 11일, 木, 석가탄신일.     


부처님오신 날은 우리 梅花의 휴무일이다. 어머니 - 매화의 주인인 그녀를, 우리 기생들은 어머니라고 부른다 - 께서 독실한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는 우리 요정이 문을 닫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다른 기생들은 올 봄에 유행하는 연분홍 숄을 걸친 채, 압구정으로 이대로 쇼핑을 가거나 홍대의 테크노 바에 간다고 나섰지만, 나는 얌전한 감색 정장을 입은 채 인사동 골목을 산책했다.


이런 나를 두고 동료들은 고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과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록 영부인 자리에 설 수는 없지만, 그의 연인으로서 누가 될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인사동 거리를 돌아보다가, 오랜만에 <귀천>에 가서 세작을 한잔 마셨다. 차(茶)는 요정에서도 늘 마시는 거지만, 가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차를 마시는 기분도 괜찮다.


마음 같아서는 그와 함께 소박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지만, 훗…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다. 차를 마시고 나와 골동품 가게를 몇 군데 둘러보다가, 영화를 보러 갔다.


감각의 제국…….


표를 두 장 끊었다. 한 장은 그의 몫이다. 영화 내내 빈 옆자리에 그가 있겠거니 하는 상상을 하며 스크린을 주시했다.     


- 단기 4333年 5月 18日, 木 -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 그리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일주일 전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나는 묘한 신열 같은 들뜸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오늘 같이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면, 내내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베 사다> 라는 게이샤와 <키치 죠우>라는 일본 시의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사다는 아내가 있던 그 남자를 사랑하다 못해 교살하고 그의 성기를 잘랐다. 그녀가 잡혔을 당시 사다는 웃고 있었다고, 아… 웃고 있었다고 한다.


일주일 내내,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쳐져서 온몸에 작은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어제 그는 광주에 내려갔다. 그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어서 두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 여론 조사에서 그가 다른 후보에게 밀리고 있다는 보도가 대서특필되고 있다. 그의 얼굴이 점점 까칠해지는 것 같다.


근간에 梅花에 오는 정치인들도 그가 대통령 후보에 마저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숙덕거린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에 대한 걱정이 커갈수록, 그리움도 점점 짙어져서 내 베게는 늘 눈물에 축축해지기 일쑤였다. 5.18 기념일 같은 거 나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가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는 평범한 남자이길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점점 기생이길 포기하고 여자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내 자신이 두려워진다.     



- 단기 4333年 5月 22日, 月.     


예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가 왔다. 다른 손님을 맞고 있던 나는 서둘러 한복을 갈아입었다. 다른 남자의 손길이 잠시라도 스친 옷을 입고 그 앞에 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 이번 달에는 그를 두 번이나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님…… 혹시나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딱 5분을 앉아 있다 돌아갔다. 그가 유독 좋아하는 매실차의 절반도 마시지 않았다. 저 매실차의 맛을 내기 위해, 내가 몇 개월간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데……


그가 오늘 온 이유는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이다. 은밀히 그가 요구한 것은, 내일 우리 요정을 찾아오는 모 의원의 수청을 들라는 것이다. 그 의원도 역시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그에게 강력한 라이벌이 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통해 그 의원이 나를 점찍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말을 하는 내내,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했다.


기생들이 손님의 요구에 응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기생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른다. 아무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 만큼 梅花의 기생들은 높은 프라이드를 지니고 있다.


그를 사랑하게 되고 나서 나는 그 어떤 손님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었다. 오로지 나는 그를 위해 존재하기에...


그런데 그가 나에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비디오로 찍겠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나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이다. 만약 내가 그의 아내였으면, 그는 나를 라이벌의 잠자리로 보낼 수 있었을까?     



- 단기 4333年 5月 23日, 火.     


오늘 나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 침대 위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 모든 행위가 제 3자의 시선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죽고 싶다…….     



- 단기 4333年 5月 31日, 水.     


오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가 梅花에 찾아 왔다. 한 달 새에 그를 세 번이나 만나다니, 이것은 기록이다. 그는 여유 있게 술을 한잔 마셨다. 이렇게 오붓하게 그와 마주 앉은 것이 얼마 만이던가. 1년도 더 지난 것 같다.


“비디오를 봤다.”


“…….”


“너, 진심으로 느끼는 것 같더구나.”


나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 미안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7부 반을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술잔이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가득 부은 후, 한마디를 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단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고 내가 따라준 술을 다 비었다. 그리고 내게 잔을 건넨 후, 다시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술을 따라 주었다.


“내가 욕심이 과했다. 정치판이 아무리 쓰레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마저 시류에 휩쓸리고 말다니……. 그 비디오 테이프는 소각했다. 정정당당히 그와 맞설 생각이다.”


그가 따라준 술이다. 나는 술 잔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보았다. 속에서 뭔가 울컥거리며 올라왔다.


“질투가 나더구나.”


끝내 눈물 한 방울이 술잔 속으로 떨어졌다. 그 만큼의 술이 흘러 넘쳐 술잔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그 속의 나는 웃고 있었다. 일렁이는 미소를 보며 그 동안 나 자신을 잘 못 알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나는 기생이기 전에 여인(女人)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한마디, 내 남자 입을 통해 듣는 ‘질투가 난다’는 바로 그 말이었던 것이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겼다. 유월이 오면 붉은 장미가 담장마다 넘치겠지……. 그를 위해 장미 차(茶)를 준비해야겠다.     


이전 05화 여자의 다리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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