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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Aug 12. 2019

추억은 방울방울

[space story]  08. 학교

나는 열두 살이야.


‘새의 선물’이라는 소설을 보면, 여 주인공은 스스로 열두 살에 성장이 멈췄다고 생각해. 하긴 양철북의 남자애는 아예 키까지 자라지 않았지. 물론 둘을 비교해 보면, 여자애는 다 컸다고 생각한거고, 남자애는 크기 싫었던 거라는 차이가 있긴 해.


나는 어느 쪽이냐면 말야, 차라리 양철북 남자애 쪽이야. 어른이 된다는 게 생각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벌써 깨달은 건지도 몰라. 그렇다고 내가 피터 팬 콤플렉스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진 말아 줘. 어른이 되는 것이 싫긴 하지만, 그렇다고 ‘애’가 좋다고 생각해 본적도 별로 없거든.


요새 나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어.


우리 반에 부자 집 외동딸인 진아라는 애가 있거든. 진아는 긴 머리카락을 7가닥으로 나누어 따서 동그랗게 올리고 다녀. 레이스 원피스는 매일 색깔이 바뀌고, 진아 엄마는 육성 회장인데 교장실로 들어갈 때마다 치마 바람에 폭풍우가 일 정도지.


사실 5학년인 딸의 학교에 한 달에 9번 오는 사람은 그 애 엄마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천만 다행으로 진아는 엄마를 닮지 않았어. 물론 외모부터 눈에 띄는 스타일이었지만, 성격 좋고 착해서 보통 부잣집 애들처럼 미움을 받지 않았어.


그런데, 바로 그게 내 심기를 건드렸던 거야. 차라리 얄미운 애였으면 아예 제쳐놓고 신경을 껐을 텐데, 부자 집 애가 왜 착한 거냐구! 그건 가난하고 성질 못된 보통 아이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야. 그래서 나는 진아를 놀려 주기로 결심했어.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영악스럽게 괴롭히는 거였지.


어떻게냐구? 그건 바로 다른 아이들의 ‘돈’을 훔쳐서 그 애 책상이나, 가방 혹은 필통 속에 넣어두는 거야. 내 새로운 취미란 바로 이거였어.


돈을 훔치는 일은 정말 스릴 있어. 돈을 훔치기 가장 적당한 시기는 반 전체가 이동하는 순간이야. 체육시간이나 조회 시간처럼 아이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난 후가 제격이지. 나는 부반장이었기 때문에 약간 늦게 나가도 그다지 의심을 받지 않았어.


사실 처음엔 조금 겁도 났어. 웬만해선 눈도 깜짝하지 않은 나였지만 남의 가방을 뒤져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는 손이 다 떨리더라구. 그래도 나는 실수를 하지 않았어. 우리 반에서 제일 성질 더러운 미영이의 돈을 훔쳐서, 진아의 산수 책 속에 넣어 두었어. 체육시간 다음이 바로 산수였거든.


예상대로 미영이는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지. 그리고 나는 산수 책을 피다가 얼른 덮어 버리는 진아를 지켜보고는 소리 없이 웃었어. 물론 범인은 잡히지 않았어. 진아가 입을 다문 이상 아무도 그 애를 의심하지는 못했거든. 물론 나도 용의 선상에 오를 일은 없으니까.


내 행동은 점점 대담해 졌고, 진아는 말수가 적어졌어. 누가 옆에서 이름만 불러도 화들짝 놀라는 일이 반복됐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 이제 다음 작전은 그 애가 범인임을 발각시킬 묘략을 수행하는 거였어.


아침에 내 짝에게 미술 도구를 안 사왔다고 하면서 돈을 빌렸어. 그리고 한참 후에 바로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빌려왔다며 짝에게 돈을 갚았지. 물론 그건 내 돈이었어.


그 돈에는 검정 싸인 펜으로 낙서가 되어 있었어. 그 돈을 잃어버린다 해도 바로 표가 나는 돈이었지. 물론 나는 낙서된 돈을 바로 훔쳐서 진아의 그림물감 속에 넣어 놨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술 시간이 됐어.


“진아야, 물감 좀 빌려줄래? 물감을 갑자기 샀더니 색깔이 없어.”


진아가 물감을 열기 전에 나는 얼른 말했어.


“얼마든지 써.”


부자 집 딸답게 호기를 부리며 진아가 물감을 건네줬지. 나는 물감뚜껑을 열기 전에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내 짝궁의 시선을 끌었어.


“우와, 이것 봐. 52가지 색깔 물감이야.”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뚜껑을 열다가,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어. 분명히 속에 있어야 할 낙서된 돈이 없는 거야. 52가지 물감을 다 꺼내 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다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어.


내가 그 돈을 다른데 넣어 뒀던가?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어. 나는 진아의 물감을 건네주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 채 새로 사온 내 물감 통을 열었어.


“……!”


검정 싸인펜 낙서가 선명한 지폐와 함께 그 동안 내가 훔쳐 왔던 돈이 그 속에 들어 있었어. 내 엉덩이를 받히고 있던 의자 그대로 땅 속으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어. 너무나 놀란 나는 성급하게 물감 뚜껑을 닫고 말았지.


다행히 내 짝은 돈을 보지 못한 것 같았어.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내려갔어. 나는 천천히 진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어. 그 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었어.


다음 날, 나는 훔칠 때 보다 더 바들바들 떨면서 아이들의 책상 속에 돈을 나누어 넣어 주었어.  겨우 한숨을 쉬고 빈 교실을 둘러보는데, 붉고 노란 노을이 구석구석에 물들기 시작했어.


허탈함에 창가에 걸터앉아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는데 눈물이 나는 거야. 철봉이며, 농구 골대 마저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어.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운동장에서 막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진아가 보였어.


“거기서 뭐해? 떡볶이 먹으러 안 갈래? 나 오늘 용돈 탔어!”


그래, 맞아.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아. 돈 많고 예쁘고 공부 잘하고 성격까지 좋은 진아는 현명하며 너그럽기까지 한 거야. 세상에는 그런 아이도 있더라구.


니체의 어떤 책을 보면 <모든 학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비꽜던 말이 있어. 지금까지는 그 얘기에 동감했지만, 이제는 달라졌어.


애는 그저 학교에 보내서, 여러 종류의 인간을 만나서 배우게 해야 하는 것 같아. 학교에서 배우는 건 지식뿐이 아니더라구.


떡볶이는 내가 사야겠어, 수업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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