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일상에서 낚아 올린 통찰] 03.
십여 년 전, 게이 인권단체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다. 성 소수자들은 본질적인 두려움을 내재하고 있다. 자신이 타인과 다르다는 인식은 그들의 자아존중감에 치명타를 준다.
나의 고민은 하나였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우리 모두는 신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가. 이 인식은 게이들뿐만 아니라, 영성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똑같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첫 번째 강의 시간에, 나는 칠판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철학적 질문 하나를 적고 시작했다.
-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몇 안 되는 수강생들은 머뭇거렸다. 누군가는 이름을 말했고, 누군가는 직업을 말했고, 누군가는 게이라고 말해서 다 함께 웃었다. 나는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차분히 강의를 이어갔다.
- 우리는 자신을 여러 가지 것으로 규정합니다. 먼저 이름, 성별, 국적, 직업부터 시작해서, 남편이나 아내, 부모와 자식 같은 역할,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 같은 이념, 기독교와 불교 같은 종교,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같은 경제적 분류까지 우리에게는 많은 우리가 있습니다. 외국이라면 인종도 자신을 규정하는 중요한 카테고리가 될 거구요. 여러분들한테는 이성애자, 동성애자라는 구분이 중요할겁니다. 근데 말이죠…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거든요. 왜 아닌지 이제부터 알려드릴께요.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소거법’으로 풀어갔다.
- ‘나의 옷’이라는 단어에서, 옷은 나 인가요?
- 아니요.
- 그럼 ‘나의 차’라는 단어에서, 차는 나 인가요?
- 아니요!
- 좋습니다. 그럼 ‘나의 몸’을 봅시다. ‘몸’은 나 인가요?
여기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몸은 너무나 나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 좋아요. 그럼 이 질문은 어떤가요? ‘나는 아버지다.’에서 아버지는 나 인가요?
- 아닌 것 같은데요?
- 네. 아버지는 역할이죠. 나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 아버지일 뿐, 나는 아닙니다. 그럼 다시 질문할게요. ‘나의 마음’은 나 인가요?
다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마음도 너무 나 같아서, 이것을 ‘옷이나 차’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 심플하게 생각해 보세요. 소유격 뒤에 붙는 모든 것들. ‘나의’ 뒤에 붙는 모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의 돈’에서 돈은 내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그럼 다시, ‘나의 몸’에서 몸은 나인가요? 아닌가요?
- 아닌 것… 같은데요?
빙고.
우리는 ‘나의’ 라는 말 뒤에 붙는 무수한 것들은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의 돈’을 잃어 버렸을 때 발을 동동 구르고, ‘나의 차’가 부서졌을 때 화를 내고, ‘나의 몸’이 아름다우면 우쭐하고, ‘나의 직업’이 훌륭하면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물질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소유격은 ‘나’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껍데기들이다. 우리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껍데기들로 겹겹이 싸여 있을 뿐, 진정한 ‘나’는 그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그 모든 소유격의 대상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소유격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그것들에게 휘둘리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사실 그 때의 강의는, 그래서 당신들이 성소수자라는 것도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용두사미의 결론만 냈었다. 그때의 나의 인식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며칠 전, 잠자리에 들었다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찾아들었다.
- 모든 소유격의 대상들은 내가 아니다. 나는 여자도 아니고, 나는 작가도 아니고, 나는 한국인도 아니다. 나는 몸도 아니고, 나는 마음도 아니고, 나는 영혼도 아니다….
가만, 영혼이 아니라고?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3중의 존재라고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그런데 그것들은 진정으로 나인가?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영혼. 이렇게 적고 보니, 이것들도 소유격의 대상일 뿐인데?
일단 소거해 보자. 지워보자.
나는 몸도 아니고, 나는 마음도 아니고, 나는 영혼도 아니다. 모든 것을 지우고 나니, 오롯이 ‘나’만 남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나다.
그 어떤 것도 덧 씌어 지지 않는 존재. 그것이 ‘나’였다.
권소연, 이라는 인격에서 모든 것을 지워나가면 ‘나’만 남는다. 이제 당신의 인격에서 모든 것을 소거해 봐라. 역시 ‘나’만 남는다. 저기 아프리카에 사는 원주민의 인격도 소거해보자. 그 역시 ‘나’만 남는다. 모든 인류의 인격이라는 껍데기를 벗기면 남는 것은 ‘나’뿐이다.
그래서 권소연 나는, 나를 ‘나’라고 불러왔고, 당신도 당신을 ‘나’라고 불러왔고, 미국인도, 프랑스인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자신을 ‘나’라고 부른다.
우리는 모두가,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I)’라는 위대한 이름.
모든 인격을 제거했을 때, 남는 존재는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신성이자, ‘위대한 나’ 다.
껍데기가 사라진 우리는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진 ‘한 존재’였다.
우리는 모두가 ‘나’였다.
진정으로 ‘우리는 하나’였다.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진 우리는 하나다.
그래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나에게 베푸는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기에.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것이 나에게 해가 되어 돌아온다.
내가 나를 미워하니, 내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삶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우리의 지구 체험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껍데기를 벗고 진정한 ‘나’로 살 것인가, 껍데기를 부여잡은 채 고통 속에서 살 것인가.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껍데기들은 견고하지 않다. 그것이 변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우리 마음뿐이다. 마음은, 내가 아니다.
내 삶에서 어떤 껍데기들은 벗겨내기 쉬웠고, 어떤 껍데기들은 여전히 내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다.
우리 모두는 되어가는 과정에 있고, ‘나’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이니, 사랑할 밖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