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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진 Nov 15. 2024

용서- 행복한 삶의 입구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프롤로그



용서라는 것이 좋은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는 절대로 용서가 안 되는 일 투성이입니다.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용서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래도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야" 라며 위로를 하지만

늘 마음은 불편합니다.


용서는 왜 그렇게도 힘이 드는 것일까요?
마음이 넉넉해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도 용서하는 마음이 자리 잡기 어렵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용서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삶은 행복해집니다.


용서하는 것은 뇌의 작용입니다.

어떤 부분이 마음을 격동시키고,

어떤 부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용서하게 하는 것일까요?


분노가 일어나는 뇌의 기전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글인  "뇌를 알면 삶이 경쾌해진다"에서 편도체에 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편도체가 흥분을 합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느끼기 전에 편도체가 먼저 감지를 하는 것이죠

편도체는 몸의 보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위험한 상황이 예상이 되면, 보초는 우리 몸이 대비할 수 있도록 뇌하수체에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뇌하수체는 부신(副腎)에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라는 명령을 보냅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집니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자율신경계의 반응이죠.


신경이 곤두서면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위협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음의 격동이 시작됩니다.


이 상항에서 뇌의 앞부분인 전전두엽에서 판단을 시작합니다.

"어떤 놈이야? 나보다 센 놈이야  약한 놈이야?"


집중해서 보니까 별것 아닌 것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거 눌러버려야겠구나!"

분노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그 상대를 향해서 

분노의 펀치를 날리기 시작합니다.

몸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면서 서서히 탈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전두엽이

"어, 좀 센 놈인데. 분하지만 조용히 있어야겠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되면,

마음을 억누르고 가만히 있으면서 속을 태웁니다.

"두고 봐라. 내가 반드시 갚아줄 테니!"


때로는, 너무 센 놈이라서 이대로 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지겠다는 판단이 섭니다.

그러면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칩니다.

오래전에 36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하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판단들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fight or run away"라고 합니다.


싸울 것이냐, 아니면 도망갈 것이냐.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인류가 야생의 생활을 하던 때, 생존을 위해서 취하던 반응이었습니다.


지금은 안전한 집에 살고 있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뇌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편도체는 계속 긴장을 합니다.

자율신경계의 반응은 인류가 야생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한 긴장을 하고 심한 반응을 하는 것이죠.

이것을 어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전두엽의 역할만큼은 우리의 노력으로 현명하게 움직이게 할 수가 있습니다.


전전두엽에게 현명한 판단을 내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생각의 훈련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죠.

자기 앞의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마음 가다듬기


요새 유난히 '용서'라는 단어가 내 마음속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도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고,

이야기를 들어도 '용서'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고

글을 쓰더라도 '용서'가 안되어 스스로 고통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더욱이 매일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생활에서

용서를 받고 싶고 용서해야 할 일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화만 내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에는 분노가 계속 쌓여 갑니다.


나의 모습을 너무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같은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여 년 전에 치과의사협회 신문에 시론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의욕이 넘쳐서,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특히 우리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제안하고 싶은 것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의 의욕이 있기는 합니다만.


원고를 쓰다 보면 조금 더 잘 쓰려고 다듬다가 마감일에 임박해서 마무리를 합니다.

이윽고 이제는 보내도 되겠다고 생각이 되어 발송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아!, 이런 내용은 안돼!" 하는 마음의 울림이  일어납니다.

내가 쓴 글을 보니, 제안이 아니라 지적하는 말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그리 많이 안다고 지적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글을 보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지적(指摘)이 아니라 나눔의 생각으로 말입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앞날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새로 쓰기 시작합니다.

글 속에 꿈을 부어 넣었습니다.


매번 원고 마감일이 되면 이런 일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늘 의욕이 넘쳐서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져서

거침없이 글을 쓰다가

투고 직전에 다시 쓰기 시작하는 꿈에 찬 글.

이런 모습이 시론을 쓰면서 매번 반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모습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의 본성은 지적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 스스로 원하지 않는 가르침을 듣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삶에서 용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많은 작가님들의 마음을 붙잡으며 인기리에 연재가 되었던 브런치글이 있습니다.

몇달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기다리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무도 가슴을 뛰게 하고 조이게 하였기 때문인데

은근히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 때문에 분노 속에서 공감을 하며

이야기의 전개에 계속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은근한 분노였습니다.

또한 동시에 '용서'에 관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서'속에는 구독자들 자신의 우월감이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우월감'이라는 것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나는 그런 마음은 가진 적이 없는데"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월감을 느꼈다고 마음이 편해졌을까요?

오히려 은근히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쌓여 갔을 겁니다.


-뇌과학적인 해석-


상대방보다 자신의 힘이 더 강하다고 생각되면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했고

대등하다고 생각을 하면 대화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했고,

상대방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이 되면 가슴앓이를 하더라도 참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당신이 늘 힘이 있을 수는 없는 거야!"라고 생각을 하면서

분한 마음을 삮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강해서 상대방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겠다고 해서 마음이 편했을까요?

그리고, 대등하다고 해서 상대를 납득시키려고 한다고 마음이 편했을까요?


그러나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마음에 편안함이 남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억누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뿐더러

설득한다고 상대가 설득되는 것도 아니고,

분을 참는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황판단


어떤 일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감지된 위험신호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훈련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묵상입니다.

명상이라고도 합니다.

이 훈련이 없으면 동물적인 반응의 수준밖에는 대응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노를 한다는 것은 일단 동물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야생 생활에서 자기 보존을 위한 반응인 것이죠.

개나 고양이등이 자신에게 대적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봅시다.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으르렁 거리거나, 야옹 하면서 상대방에게 접근하면 위험하다는 표시를 하겠지요?


사람이 그러한 모습을 취한다고 하면, 누가 봐도 웃기는 모습이 될 겁니다.


장군이 적군에 대해서 으르렁거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느긋한 모습을 보입니다.

장군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훈련 덕분이지요. 마음과 몸을 평상시에 연마해 두었기 때문에 든든한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분노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에 대해서 대항할 힘이 약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상대가 뭐라고 하든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대하면, 오히려 상대는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묵상입니다.


묵상의 효과


묵상을 하는 사람의 fMRI를 촬영해 보면, 뇌가 깊은 휴식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면을 취하면 기초대사량이 __%가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묵상을 하면 그보다 훨씬 기초대사량이 감소를 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이죠.


여유로운 마음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든 열린 마음이 됩니다.

올바른 지혜에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자기의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심장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바쁘게 지내느라고 그럴 여유를 갖지 못했는데,

지금 이렇게 여유로운 자리가 주어졌으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했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참 바보 같은 상태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상대방은 조금도 마음이 상해하지 않고 있는데,

자신만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죠.

분노할수록 손해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바보 같은 장사는 그만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언에 분노에 관한 글들이 많습니다.

분노를 참는 것은 장군보다 낫다.

분노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장군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이죠.

분노를 참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

성을 빼앗는다는 것은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노를 참는 것이 나라를 빼앗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이죠.


이렇게 좋은 것을 자신에게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졸은 일입니까?

이를 갈면서 몸을 상하게 하면 상대방은 더욱 즐거워할 겁니다.

그래서 분노를 내려놓는 것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분노를 참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현명해져야 할 만큼 많은 것을 마음과 몸에 익혀 왔습니다.

그것을 바르게 발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의미 있게 가꾸어가는 길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중요한 것은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1) 분노는 원시생활을 할 때 필요했던 지나친 민감한 반응 때문에 일어납니다

2) 지금은 원시생활과 같은 위험한 환경이 아닙니다.

3) 마음이 넉넉하게 되도록 전전두엽의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명상이 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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