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는 생각
요새도 청춘소설이라고 있나요?
조흔파(1918~1980) 작가는 청춘소설 '얄개전'으로 유명합니다.
그 소설에는 청춘남녀의 설레는 만남 장면들이 나오는데요,
주인공 '얄개'는 운동회날 좋아하던 여학생 '인숙'이의 손을 잡고 뜁니다.
그리고 나서 인숙이를 잡았던 손의 감촉을 지키려고 자기 손을 붕대로 감고 다닙니다
요새도 그런 설렘이 있겠지요? 그래도 그때만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당시로서는 남녀 학생이 마주 보는 것도 부끄러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손을 잡았으니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겠습니까.
설레는 만남
사람들을 만날 때 이런 두근거림이 늘 있으면 좋겠지요?
생텍 쥐뻬리(Saint Exupery)의 '어린 왕자'에도 그 마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만나기 전 마음의 설렘을 'apprivoiser'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같이 있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을 품는 것이죠.
연애할 때는 늘 그런 마음으로 행복해하는 것이 사람이죠.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 마음이 슬슬 사라지는데 왜 그럴까요?
알고 싶은 이어령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분이 계시죠.
이어령 선생님입니다.
20대에 이미 탁월함을 보이신 선생님이고, 나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선생님을 흠모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일으키는 글을 많이 쓰셨죠. 아마도 식민사관으로 열등한 마음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던 시절의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은 읽을 땐 가슴 설레는 내용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에 책꽂이를 정리하다 보니,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책이 있더군요.
아내 아니면 딸이 언젠가 사서 읽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처음 보는 책이었으니까요.
책꽂이에서 꽂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읽기를 미루어 왔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 이름이 '읽고 싶은 이어령'인데 선생님이 발행하신 책이었습니다.
자기 책의 제목을 왜 그렇게 지으셨을까. 좀 의아했죠.
그런데 첫 장을 펴면서 가슴이 뭉클해 오더군요.
"인호야......"
최인호 작가님의 이름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최인호 작가님이 이어령 선생님의 글들 중에서 몇 편을 뽑아서 이름을 그렇게 정해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읽기 시작하면서 여느 때와 같이 글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몇 편의 글을 읽고 나서 그다음 글을 읽는데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선생님의 분노하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독서 무용론"이었습니다.(주 1)
"엣?! 선생님께서 독서 무용론을 말씀하고 계신다니, 무슨 이야기지?"
긴장이 되면서 글에 눈이 집중되었습니다.
분노하신 선생님
선생님께서 한 번은 세미나에서 말씀을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독서모임이니 책 읽는 유익함을 참석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켜 주고 싶으셨겠죠.
그래서 여러 자료들에서 뽑아내어 멋진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부조리들이 머릿속에 떠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삿짐 차들을 봤던 기억이 나시면서, 가난한 집안의 이삿짐은 번듯한 가재도구는 별로 없어도 책들은 많이 보였던 모습이 생각이 나셨고, 잘 사는 집의 이삿짐 차에는 번쩍거리는 가구는 가득한데, 책이라고 해야 장식용 전집류 정도 밖에는 없었던 모습이 떠 오르셨던 것입니다.
세미나 장에 도착해서 강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선생님의 머릿속에 가난한 이삿짐 장면이 떠 오르셨습니다.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한 것일까......"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준비해 가셨던 원고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예정에도 없던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요? 그건 가난의 길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선생님의 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그려졌습니다.
분노하게 되는 것은 편도체라는 것 때문입니다. 위험하다고 느끼질 때, 분한 마음이 들 때처럼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편도체가 흥분을 하지요.
그러다가 차분한 마음이 되면 흥분이 가라앉습니다.
전전두엽 피질이 마음을 다스리기 때문이죠.
후회하시는 이어령 선생님
"독서 무용론"의 후반부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변명하고 싶다. 날씨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던들...... 아니,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교양 있는 친구들이 손해만 보고 살지 않았던들...... 깡패들이 설치지만 않았던들...... 그리고 그 이삿짐이 생각나지만 않았던들..... 세미나는 그런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책상에 앉아 차분하게 글을 쓰시면서 자신의 분노로 엉망이 되었던 그 강연회장의 모습을 돌이켜 보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전전두엽이 판단을 내려 준 것이죠.
선생님도 자신의 모습이 많이 아쉬우셨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좌석을 채우고서 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기다리고 있던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셨다면 분노보다는 연민의 마음으로 준비해 가셨던 원고를 보다 열정적으로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어린 왕자가 만날 존재에 대한 기대를 하는 마음.
생텍 쥐뻬리는 "길들인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자신을 만들어 가는 모습입니다.
그 마음이 함께 있을 시간을 기다리게 해 주는 것이죠.
apprivoiser
부부간의 설렘이 늘 이어지려면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계속 커져가야 합니다.
평생을 산다고 상대방을 다 알 수는 없지요?
같이 살면서 이 세상 떠나기 전까지 사랑한다고 하는 짝에 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 될까요?
연민의 마음. 공감의 마음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 공감의 마음을 키워 나가는 삶의 시간.
새해에는 희망이 더 커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 1) 읽고 싶은 이어령, 이어령 지음, 여백, 2014. "독서 무용론" p116~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