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환자였던 그 청년은 궁금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내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 청년은 매번 진료가 끝나면 A4용지 3장 정도의 질문을 메일로 보내곤 했습니다.
자신이 찍은 입안 사진을 첨부해서 말이죠.
나는 답변을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에게 내가 아는 전문지식을 설명해 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일반인들에게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어떤 것은 상당한 경험이 있어야 이해가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극히 상식적인 것도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일반인에게는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쉬우면 오히려 신뢰를 잃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청년은 치과교정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엄청난 궁금증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3년가량을 치료받았습니다.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가까워지는 것이 사람의 관계입니다.
이 청년이 하루는 나에게 "선생님을 제 멘토로 삼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나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하는데 즐거울 수밖에요.
그 이후로 치료문제를 떠나서 그 청년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오사카에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오사카? 오사카는 왜?"
내가 오사카에 오래 거주를 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에게 물을 것인 있을까 해서 물어본 건데,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를 찾기 위해서 갑니다."
"…..."
저는 "그래?" 하고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자기를 찾기 위해서 외국에 까지 가야 하나……
지금 와서 생각을 해 보니 ,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궁금증이 많았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것을 오사카라는 곳에 가면 혹시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내가 오사카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멘토인 나에게서 느껴지는 것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를 찾고 싶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다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행복해지고 싶다는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것인가,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겠지요.
가만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열심히 따라가면 살아온 시간 동안에, 자신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점일 것입니다.
나 자신도 긴 시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내가 지금의 전공을 택한 것도 그것이 꼭 나에게 맞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해보고 싶다. 열심히 하면 많은 성취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택한 것이니까요.
나는 그 당시는 생각을 못했습니다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청년의 마음을 많이 이해할 것 같습니다. 마치 나의 그 시절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일수록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이 많겠지만,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대개 가슴에 많고 많은 꿈을 품고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꿈이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는 할 수는 없지만, 그 무엇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는 것이지요.
때때로 미래의 자신의 방향을 정하는 것 때문에 부모님과의 갈등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을 부모님이 바라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긴, 자기가 원하는 방향에 부모님이 크게 기뻐하더라도 마음이 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쁜 마음이 들겠지만, 그 방향으로 나가면서 만나는 어려운 점이 있을 때,
누구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기라는 것은 누구도 알려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조차도 사람에게는 자유선택권이 주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알려 줄 사람도 없고, 넓고 넓은 세상의 어디에 가서 자기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헤매도 찾지 못하고 삶을 마감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자기 찾기는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빅터 프랭클이(1905~1997)은 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사였습니다.
그도 어린 시절에 많은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정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고, 부모님은 자녀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에 삶에 대해서 이런 답을 얻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삶이 나에게 묻고 있는 의미를 책임을 가지고 답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빈은 세계적으로 심리학의 중심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 모두 오스트리아 빈 출신입니다.
프랭클도 빈 출신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일찍부터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서 프랭클의 생각이 그렇게 발전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삶을 허무하다고 생각하고,
때에 따라서는 삶을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생각할 때,
의미를 알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갈등 때문일 것입니다.
2000년에 들어와서 우리 사회가 참 어려워졌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1997년 11월, 우리나라 경제가 거의 디폴트에 떨어지면서 IMF의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지요.
우리나라의 가장들이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때 이런 짤막한 노래가 유행을 했었지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짤막하고 단순한 반복되는 가사였지만,
그 노래로 힘을 얻은 우리의 가장들이 참 많습니다.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 노래는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중요한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삶이 되기 전에는 삶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책을 읽고 마음에 감동이 와서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변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감동은 슬며시 사라져 버립니다.
망각의 법칙으로 알려진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1850~1909)는 사람의 기억력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의미 없는 음절, 즉 "WID" ZOF"와 같은 세 음절로 된 의미 없는 단어를 암기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실험 참여자들은 학습직후 20분 만에 48%를 망각하고, 하루가 지나면 67%가 망각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망각곡선입니다.
책을 읽고 마음에 감동이 왔지만, 복습 없이 하루만 지내면 10개 중의 3개만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어집니다.
나도 앞의 지식들을 들은 것은 참 오래되었지만, 들었다는 것조차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각지도 않게 기억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같은 책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어 나가다가 기억이 난 것입니다.
왜,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었을까요?
우연히 소개받은 책이 나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자의 저술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읽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읽었던 것이죠.
수도 없이 반복해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책의 구석구석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배우기만 해서는 안된다.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배울 학(學), 익힐 습(習)
어디서 들어본 단어 아닌가요?
바로 학습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에
"배우고 자주 익히니 어찌 아니 즐거운가?"(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나는 학습은 배우는 것이라고만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배운 것을 익히는 것, 자신에게 녹여내는 것이라는 것을, 반복독서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