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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무관심 Jul 26. 2021

<용서받지 못한 자>(2005), 리뷰

그 많던 악덕 고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구든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래도록 나락을 들여보다 보면 나락 또한 내 쪽을 들여다보는 법이니까. - 니체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얘기한다. 어떤 이는 술자리에서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며 한 걸음 한 걸음 행군했던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또 어떤 이는 이등병 때의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비로소 자신이 철이 들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말 뒤에 '남자는 역시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이 돼'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우리 때는 참 맞기도 많이 맞고 욕도 많이 듣고 그랬는데, 요즘 군대는 참 편해졌다며 그것도 군대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재능이 있는 어떤 이들은 군대 이야기를 영화나 드라마로 풀어내고 또 만화로 그려내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 군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레퍼토리는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축구, 사격, 행정업무 등 모든 분야에서 극강의 전투력을 발휘했던 자신들의 현역 시절에 대한 예찬과 이등병 시절 때 억울하게 당해던 피해자로서의 고생담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군대를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참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 욕을 들으며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후임들을 지독하게 갈구고 때렸다고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얘기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그 많던 악덕 고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화는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 모든 예비역들이 부정하고 싶었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묻어두고 싶었던 불편한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단지 인간적인 삶을 원했던 한 군인이 집단 내에서 처참히 짓밟혀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아쉬운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그의 저항이 마침내 힘을 다해 체제의 적극적 옹호자로 돌아섰을 때 너도 별 수 없구나, 너 같은 놈이 알고 보면 더 한다고 하며 단 한 번도 부조리에 대항하지 못했던 자신을 위안하며 그를 조소한다. 그리고 그가 끝내 그 누구에게도, 자신에게조차 용서받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을 때, 우리의 입은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아직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했으니까. 


이등병 시절에 휴머니스트가 아닌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너무나도 처절하기에, 기본적인 인권마저 소수의 특권이 되는 곳이기에, 자신의 세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진심은 그 어떤 혁명가 못지않다.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세계를 이루어간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의 군인들이 권력과 규율이라는 괴물에 끌려다니며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비로소 자신이 괴물이 되기 전까지. 


영화는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괴물이 되었던 너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냐고. 용서를 하기 위해선 자신이 한 잘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부조리의 정점에서 폭력의 가해자였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고 살아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모두가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그 끊임없는 사슬을 끊는 시작이 될 것이다. 마치 <용서받지 못한 자>의 감독이 지금까지 용서받지 못했던 스스로를 이 영화를 통해 용서하고 있는 것처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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