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누나는 조금 일찍 결혼한 편이었고, 덕분에 나도 어린 나이에 삼촌이 될 수 있었다. 여느 삼촌 이모들처럼 나 역시 조카 바보를 피할 수 없었다. 기저귀 한 번 내 손으로 갈아줘 본 적이 없지만, 어쩐지 이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산 집에 내려갈 때마다 조카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도 방학이 되면 서울로 올라와 일주일, 이주일을 머물기도 했었다.
맞벌이를 하는 누나네에겐 친정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엄마는 누나와 매형이 일을 하러 나간 사이 두 조카들을 돌보았다. 밥을 먹이고 놀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구구단이나 시계를 보는 법도 알려주었다. 아이들에겐 할머니가 또 한 명의 부모였을 거다.
의진이가 아직 금향이던 어느 계절, 부산의 한 공원에서였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첫째 조카와 중학생이 될 둘째 조카, 그리고 엄마와 함께 저녁 산책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밤공기가 차가울까 엄마는 앞서 걷고 있는 조카들에게 겉옷을 챙겨 입으라고 재촉했다. 아이들은 괜찮다며 가던 길을 이어갔다. 뱃속에 있던 아들 때문이었을까. 이제 나도 곧 부모가 되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한 번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한 번도 마음에 닿지 않았던 할머니의 내리사랑이 또렷이 새겨지는 기분과 함께 지난 십여 년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 나는 아이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얘들아, 할머니가 진짜 너희들 다 키웠어. 너희 진짜 할머니에게 잘해야 해.”
조금 쑥쓰러웠지만, 나름 어른의 도리를 다 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 즈음 둘째 조카가 나를 돌아보며 멈춰 섰다. 그리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답했다.
“삼촌, 삼촌도 할머니한테 잘해야 해.”
조카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떤 대꾸도 할 수 없던 그 말에 나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밤공기가 조금 서늘했던 그 계절이 언제였는지 아직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의진과 함께 있는 어느 시간엔 조카의 그 말이 마음속을 맴돌 때가 있다.